아쟁으로 케테 콜비츠를 그리다
아쟁으로 케테 콜비츠를 그리다
  • 황호준_국악 작곡가
  • 승인 2007.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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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콜비츠 목소리, 아쟁의 독특한 음색 통해 다시 세상으로…

황호준
작곡가
10대 시절의 끝자락이던 열 아홉 살 겨울. 자주 찾던 서점에서 우연히 독일의 여류 화가 케테 콜비츠의 판화집을 접했다. 집에 돌아와 단숨에 읽었는데도 며칠이 지나도록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그림들은 머리에 기억된 것이 아니라 심장에 새겨진 파편처럼 강렬하게 남아 심장이 멎는 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의 그림 속 이미지가 주는 비감(悲感)을 곱씹으며 청년기를 맞이했다.

 

 

삶을 그리는 화가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판화들을 통해 20세기 초 독일 민중들의 삶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콜비츠는 빈곤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으로 포착해 내고 있는데, 특히 연작 판화 <직조공들의 봉기>는 콜비츠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봉건적 사고와 편견에 맞서는 진보적 여성관이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통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후 콜비츠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둘째 아들이 전사하면서 전쟁에 대한 비극적 참상을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이 시기에 연작 판화 <전쟁>을 통해 죽음에 대한 절망과 분노,  그리고 모성을 담아내고 있는데, 이 작품은 중국의 진보적 화가들의 목판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며, 우리의 80년대 민중미술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아쟁 고유의 ‘탁함’과 ‘맑음’이 희망을 깨우다

작년에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녀의 작품 <죽음에의 초대>를 다시 보게 됐는데, 문득 그녀의 그림 속 이미지를 담은 음악을 작곡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오래전부터 그녀의 그림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첼로를 위한 연주곡을 작곡해 보고 싶었는데, 우리의 대표적 전통악기인 아쟁 특유의 느낌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첼로에 비해 다소 탁한 음색을 가지고 있는 아쟁은 전통 음악 특유의 굵은 농음(떠는음) 표현이 가능해 마치 격하게 우는 듯한 소리표현이 가능한 악기다.


아쟁의 현과 활이 직각으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지는 특유의 성음은 한국 전통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성음들과 어깨를 같이한다. 아쟁은 크기와 음역에 따라 두 종류가 있는데, 산조와 시나위에서의 소아쟁은 한국적인 정서의 한 축을 담당하는 ‘한’의 정서를 대표하며, 정악에서의 대아쟁은 평온하고 절제된 저음의 진수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아쟁 소리에 내재된 ‘탁함’은 한국적 정서의 중요한 메타포이다. 콜비츠가 죽음에 대한 절망과 분노에 머문 것이 아니라 모성이 갖는 생명력을 통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곡한 음악을 통해 아쟁 특유의 ‘탁함’뿐만 아니라 ‘맑음’을 동시에 끌어내고 싶었다. 물론 여기에서의 ‘탁함’과 ‘맑음’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서적 축을 담당하며 각각의 느낌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게 하며 서로를 보완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작곡된 대아쟁 연주곡 <케테 콜비츠에 대한 명상>은 애초의 의도대로 작곡됐고 수차례 연주되면서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귓가를 맴도는 콜비츠의 ‘예술관’

사실 내가 콜비츠의 그림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그녀의 <자화상>이다. 매 시기별로 다양하게 그려진 <자화상> 들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1922년에 완성된 <자화상>에 나타난 그녀의 움푹 꺼진 눈매는 다소 지친 듯한 삶의 흔적이 보이면서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어머니의 생명력이 엿보인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에 새겨진 이미지의 파편은 콜비츠의 그림이 아니라 그녀가 살아낸 삶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녀가 던진 위의 한마디는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삶의 내용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내가 두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온전히 감각하고, 진정으로 감동하고, 올바르게 표현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