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LCD 산업에서의 전략적 혁신
반도체·LCD 산업에서의 전략적 혁신
  • 참여와혁신
  • 승인 2007.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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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시 신념이나 믿음보단 수요 있을 때 접근하라”

이병주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그동안 반도체와 LCD 산업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향후 두 산업 모두 경쟁이 격화될 것으로 보여 힘든 미래가 예상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략적 혁신이 필요한 때다.


우리나라를 IT 강국으로 만든 산업이 반도체와 LCD 산업이다. 두 산업 모두 후발 주자로 시작해서 선진국들을 역전시키고, 세계 1위로 우뚝 서는 과정을 거쳐 왔다. 그래서 이 두 산업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경제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 산업의 지속적인 성공이 필요하다. 그러나 앞으로 두 산업에서 과거와 다른 게임룰의 변화가 예상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반도체와 LCD 산업에서의 과감한 전략 변화, 이른바 전략적 혁신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반도체·LCD 산업의 최근 동향
잘나가던 반도체는 ‘헉헉’대고 절망했던 LCD는 기지개 펴고

 

먼저 반도체와 LCD 산업의 상황을 살펴보자. 최근 잘나가던 반도체 산업은 힘들어 하고, 절망의 한 해를 보낸 LCD 업계는 기지개를 펴고 있다.


미국 반도체협회가 발표한 지난 4월의 세계 반도체 매출액은 199억 2천만 달러로, 2006년 11월 225억 달러 대비 11% 이상 감소한 수치다. 2005년부터 주요 반도체 업체 간 설비 투자 경쟁으로 인해 수요 증가를 초과하는 공급 과잉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반도체 고정거래 가격을 보면 2007년 1월 6달러에 가깝던 DRAM 가격이 4개월 만에 1/3도 안 되는 2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플래시메모리 시장에서도 나타난다. 2005년 수요와 공급이 거의 비슷하던 시장 환경이 2007년 들어 30% 이상의 공급 과잉이 지속되고 있다. 주요 반도체 업체들 간의 설비 증대 경쟁으로 인해 공급능력이 갑자기 커졌기 때문이다. 2005년 이후 지속적인 수요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때 10달러까지 올라갔던 가격이 최근에는 2달러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는 지금 거센 경쟁에 놓여있다.

 

반면 LCD업계는 2005년과 2006년의 실적 부진으로 인해서 올해 설비 투자 규모가 산업 전체적으로 축소돼 생산능력(Capa) 증가율이 크게 둔화되었다. 이로 인해서 수요 증가를 충족시켜줄 공급이 부족해 가격이 안정화되고 있다. 올해 들어 주요 디스플레이 패널 가격 추이를 보면 32인치 TV용 패널은 310달러 선에서, 42인치 TV용 패널은 560달러 선에서 가격이 안정화되고 있다.

 

노트북과 모니터용 패널과 함께 TV용 패널도 가격 안정세가 지속됨에 따라 LCD 업계의 수익성이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LCD 업체들은 보유하고 있는 생산능력(Capa)조차 수익성 저하가 우려된다면서 가동률을 축소하고 있다. 향후에도 공격적인 설비 증설을 자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른바 업체들이 서로 암묵적인 담합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과거 ‘제 살 깎아먹기’식의 인치(inch) 경쟁을 하던 상황과는 너무도 달라졌다. 아픔을 경험한 후 성숙해진 것인가? 현재 LCD 업계는 서로 협조하는 전략을 채택하여 참여자 모두 이익을 보고 있다.

 

이처럼 반도체 업체와 LCD 업체들의 전략적 차이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인가? 반도체 업체들 사이에서는 암묵적 담합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인가? LCD 산업에서의 평화 공존은 일시적인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선 반도체와 LCD 산업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도체와 LCD 산업의 공통점과 차이점
제조방식·기술경쟁 비슷, 기술환경·수요환경 차이

 

반도체와 LCD 산업은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비슷한 산업으로 생각될 정도로 공통점이 많다. 우선, 반도체와 LCD는 동일한 수요자를 가지고 있다. PC나 노트북,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휴대폰, TV 등 디지털 기기들에는 가동 및 저장장치로 사용되는 반도체가 들어가야 하고, 화면은 LCD를 통해 구현된다. 둘째, 두 산업은 장치산업으로 막대한 설비 투자가 들어간다는 것이 비슷하다. 셋째, 반도체는 속도와 용량을, LCD는 크기를 키우기 위한 기술 경쟁을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넷째, 두 산업은 제조 방식도 흡사하다. LCD 제품은 유리에 수십만 개의 트랜지스터 회로를 만드는 기술이 중요한데, 이것은 반도체 생산 공정 중에서 웨이퍼에 사진을 찍어 전자 회로를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법이다. 다섯째, 반도체와 LCD 산업의 경쟁 구도 역시 비슷하다. 두 산업 모두 소수의 플레이어들이 경쟁하고 있다. 여섯째, 일본 업체들이 초기에 시장을 주도했지만 결국 한국 업체들에 의해서 역전되었다는 점, 대만과 중국 업체가 따라 오고 있다는 점 등이 흡사하다.


그러나 반도체와 LCD 산업은 비슷한 점이 많지만 몇 가지 포인트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경쟁 구도가 다르다. 비슷한 여러 업체들이 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LCD와 달리, 반도체 산업은 강력한 하나의 업체가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업체별로 경쟁을 해서 얻는 이득이 다르다.

 

기술이나 자본, 생산 역량이 앞서 있는 업체는 공격적으로 경쟁을 하더라도 원가 구조 등이 좋기 때문에 손해를 덜 보고, 상대방을 이겼을 때 훨씬 커다란 이익을 얻게 된다. 이렇게 되면 최근 LCD 산업에서처럼 암묵적 담합이나 협조 상태가 나타나기 어렵다. 오히려 싸움을 걸어 후발 기업을 퇴출시키기 위해 공세 전략을 취한다. 지금까지는 삼성전자가 선두 업체로서 후발 기업에 대한 공세를 강하게 취해서 이익을 본 것도 이 때문이다.


둘째, 기술 환경이 다르다. 두 산업은 모두 기술 경쟁을 통해서 업체들이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도체는 속도와 용량을 키우기 위해서 기술 개발에 사력을 다하고, LCD는 크기를 크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설에 투자를 하는 등 기술 경쟁을 한다. 그러나 반도체와 LCD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반도체는 경쟁의 끝이 없고, LCD는 경쟁의 끝을 예상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용량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침이 없다.

 

디지털 기기에 탑재되는 반도체의 용량이 무한정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활용가치가 높아진다. 그래서 반도체의 기술 경쟁은 한계가 없다. 물론 반도체 역시 물리적으로 15나노미터(nm) 이하로 만들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시기는 아직 먼 미래다. 반면 LCD의 경우 크기가 무한정 커질 수는 없다. 공공장소가 아니라면 집에서100인치 TV를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LCD 기술 경쟁의 핵심인 크기 경쟁은 한계가 있다. 이렇듯 반도체 산업에서는 경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술 경쟁의 끝이 보이면 적자가 나고 힘들더라도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경쟁을 지속할 텐데, 반도체 산업에서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경쟁자들이 스스로 포기했던 것이다.


셋째, 수요 환경이 다르다. 두 산업 모두 비슷한 수요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는 전방 산업, 즉 수요자 층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메모리 반도체라고 하더라도 수요자에 따라서 제품이나 플랫폼이 달라졌다. PC에 채택되는 DRAM 시장이 어느 정도 포화되고 공급이 넘치자, 디지털 기기에 들어가는 플래시메모리가 출현했다. 사실 반도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DRAM과 플래시메모리는 서로 다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수요처가 나타나게 되면 가장 먼저 소비자를 선점하는 기업이 많은 이윤을 가져가게 된다. 삼성전자가 2001년 반도체 불황을 플래시메모리로 극복한 것이 좋은 사례이다.

 


반도체·LCD 산업과 한국식 경영
지나친 투자, 지속발전 않는 시장에선 오히려 ‘독’

 

이와 같은 특징은 한국기업의 경영방식과 잘 맞아 떨어졌다. 한국기업은 수요를 분석하고 시장성을 따져서 합리적으로 투자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한다. 과거 정부 주도의 발전 과정에서 경제성보다는 성장 논리에 따라 덩치를 키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정부가 과도하게 외형을 키워서 문제가 생긴 기업을 구제해 주는 상황에서 과감함은 도전이고 용기로 장려됐다. 그래서 한국기업은 이러한 방식을 많은 산업에 적용했고, 또 성공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시장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나 들어맞는다. 가령 시장이 정체되어 있고 소비자 니즈의 변화가 더딘 소비재의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이러한 산업에서는 지나친 투자는 해가 된다. 시장의 발전이 지속되지 않는 곳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효과적이지 않다.

 


대만 업체의 의도적 후발 전략
높은 위험 무릎 쓴 투자보다 안전성과 합리성 선택

 

한편 반도체와 LCD 산업에서 함께 경쟁하고 있는 대만 업체들의 전략은 전혀 달랐다. 심지어 반도체 산업에서는 직접적인 기술 경쟁을 하지 않고 생산 시설만 갖추고 다른 반도체 설계 업체의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을 하고 있다. TSMC에서 시작된 이 겸손한 반도체 사업은 대만의 반도체 역량을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다.


또 대만 LCD 업체들은 작년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가 7세대 증설 경쟁을 할 때, 지켜보는 전략을 택했다. 이러한 대만 업체들의 전략은 비록 초기 시장을 선점하지는 못하지만 검증되고 안정화된 장비를 저가에 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굳이 7세대 라인에서 40인치 이상의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것보다 5세대나 6세대 라인에서 40인치대 제품을 소량 생산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커지면 7세대에 투자해서 대량 생산 체제로 바꾼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올해 대만 업체들은 40인치대 제품들의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자 7세대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높은 위험을 무릅쓰고 확실하지 않은 곳에 투자하기보다는 안전하면서도 합리적인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으로 작년 한국의 LCD 업체가 고전할 때도 안정적인 이익을 낼 수 있었다.

 


대만 업체의 전략적 혁신을 배울 때
수요 있을 때 접근하는 합리적 전략 요구 시점

 

그러면 한국의 반도체·LCD 업체들은 왜 이리도 과감할까? 아마도 과거의 성공체험 때문일 게다. 과감한 선도 전략이 반도체 산업에서 너무나 큰 성공을 거뒀다. 가령 반도체 경기가 최악이었던 2001년에는 PC 중심의 DRAM에서 탈피하여 디지털 기기용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해 반도체 가격 폭락을 이겨냈다.

 

심지어 2001년 히다치가 삼성전자에게 반도체 불황 속에서 리스크 부담을 덜기 위해서 플래시메모리 사업과 관련한 전략적 제휴를 제시해 왔을 때도, 삼성전자는 플래시메모리 역시 시장을 선점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환경이 과거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먼저 이야기했던 반도체 산업의 세 가지 특징이 달라지고 있다. 우선 한 업체의 시장 주도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 2007년 1분기 DRAM 시장을 보면 하이닉스와 ProMOS 군의 점유율이 삼성전자를 넘어섰다(<표> 참조). 시장 선도 업체를 견제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이 전략적 제휴를 맺어 과점 시장으로 변한 것이다.

 


또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 변화 역시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반도체 매출과 자본 투자 추이를 보면 최근 들어 투자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그만큼 설비 경쟁을 덜 하는 것이다. 실제로 용량 증가 속도가 완화되고 있다. 기술 발전의 한계가 당장 눈앞에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속도가 완화된 것은 분명하다(<그림> 참조). 그리고 새로운 전방 산업의 출현도 쉽지 않다. 2000년 이후 디지털 혁명과 같은 새로운 수요의 폭발은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반도체 산업도 LCD 산업처럼 능력이 비슷한 참여자들이 벌이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반도체 산업의 경쟁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수업료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쟁하다가 결국 투자를 조절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LCD 산업에서는 이러한 게임 룰을 작년 출혈 경쟁으로 이미 배운 듯 하다. 차세대 설비 투자의 경우 선도자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서둘러서 진행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최근 LCD 업계의 수익성이 좋아지면서 기술 경쟁이 다시 재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충분한 수요가 존재한다면 적극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모함은 안 된다.

 

지금까지 한국기업은 엄청난 투자를 하는데 있어 전략적 판단보다는 신념이나 믿음이 앞서 왔다. 이제 수요가 있을 때 접근하는 합리적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한국기업에게 이것은 단순한 전략 변화가 아니라 전략에서의 혁신이다. 우리가 얕보고 무시하고 있는 동안 어느 새 우리와 대등한 수준에 이른 대만 업체들에게서 전략적 혁신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