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대책없다”
“미안하다. 대책없다”
  • 승인 2005.03.10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업·업종 노사 끝없는 줄다리기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 몫으로


상시 구조조정 체제 10여년. 구조조정을 둘러싼 갈등에서 우리 노사는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회사경영이 어려워 인원을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회사의 말을 믿지 않는다. 회사도 인력감축 외의 방안을 찾자는 노동조합의 제안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접점을 찾지 못하는 노사는 물리적 충돌, 해를 넘기는 파업까지 가는 극한 대결을 벌인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밀려 나와 빈곤층으로의 길을 걷는다.


매년 반복되는 갈등 끝에 최근에는 개별기업 단위, 또는 산별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산업차원의 노사가 공동의 대책을 마련해 보자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가로 놓인 불신의 장벽은 여전히 두텁다.

뿌리 깊은 불신과 어용시비
구미지역에서 최근 불고 있는 감원 바람을 바라보며 지역 노동단체의 한 간부는 “진짜로 기업이 어려운 건지 아니면 인건비 절감을 위해 괜한 엄살을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기업이 흑자를 냈을 때는 경영실적을 공개하지 않다가 적자만 나면 알려달라고 하지 않아도 노동조합에 찾아와 상세히 적자 내역을 설명한다며 신뢰가 쌓이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했다.

이런 불신이 쌓이면서 노동조합은 회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어용’이라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한다.


실제로 조합원들이 쫓겨나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노조간부들의 답답한 심정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대규모 명예퇴직에 이은 정리해고로 새해 벽두부터 ‘난장판’이 된 코오롱 노동조합의 장철광 위원장은 “IMF 이후 조합원들 사이에서 창업이나, 취업알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꾸준히 있었지만 노동조합 입장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이 주도적으로 전직지원에 나설 경우 ‘구조조정을 인정한 것 아니냐’는 비난에서부터 ‘어용 집행부’라는 선명성 시비까지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난 2001년 900명의 생산직 노동자를 감축한 태광산업의 경우 정리해고 실시 당시 회사가 노동조합에 퇴직자의 재취업을 위해 ‘미래고용센터’를 운영하자고 제안해 왔다.

노동조합의 입장은 단호했다. 정리해고 자체가 부당한 것이므로 이를 거드는 어떤 일에도 협조할 수 없다는 것. 태광산업 정리해고저지투쟁위원회 김승옥 의장은 “당시에는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업장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노사가 서로의 주장만 앞세우는 동안 900여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일터를 떠났다.

이처럼 기업단위의 경우 구조조정과 고용조정을 둘러싸고 노사간, 노노간 불신과 갈등으로 좋은 일자리를 지키기는커녕 노동자들의 전직훈련을 비롯한 고용실업 정책과제를 눈앞에 두고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기업이 교육훈련시스템 전반에 대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 경영환경 변화에 따른 단기수익성 확보에만 치중하고 있는 점이 인력개발정책을 수립하는데 딜레마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사업체 인적자원의 운용실태 조사자료’에 따르면 회사측과 노동조합이 수시로 직업능력개발을 논의하는 경우는 14.4%에 그친 반면 전혀 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응답은 37.3%에 달했다. 

 

산업·업종별 대책 마련도 진전 없어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교육훈련 등이 기업차원을 넘어서 지역적, 업종별, 산업별로 정책요구 의제로 형성되고 있는가 하면, 최근 들어 노사간 공동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금융, 자동차 등 산업 업종차원에서 교육훈련 등 인적자원개발정책을 놓고 노사간 교섭 또는 협의채널이 활성화되는 등 지역적, 업종별, 산업별로 노사가 공동으로 대화채널 형성을 위한 의제선정, 정책요구 등을 추진했으나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다.


가장 첫 테이프를 끊은 곳은 금융산업. 은행권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2002년 노사정위에서 이 주제를 공통의 의제로 삼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금융노조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흐지부지 됐다.

 

당시 금융노조 정책실에서 일했던 한 간부는 “그때까지만 해도 노조가 전직지원이나 퇴직관리 얘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 됐다”고 회상했다. 해고를 막아야할 노조가 오히려 해고를 합리화하는 제도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일부 조합원들의 반대 여론 때문에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던 것. 금융권에서 매년 3만 명 이상의 퇴직자가 배출되면서 논의는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2003년 말 은행연합회와 금융노조는 퇴직노동자들의 재취업 방안, 퇴직 후 생애관리 프로그램 마련을 위해 연구용역 및 실태조사, 조합원 수요조사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프로젝트에 소요되는 비용은 은행연합회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1년여 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던 이 프로젝트는 현재 은행연합회의 비용 부담 거부로 다시 제자리걸음을 하는 중이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각 은행 별로 별도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다가 당장 구조조정이 진행되지 않는 은행의 경우 비용 부담이 어렵다는 입장을 전해왔다”며 “은행연합회가 사용자 대표로 산별교섭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 기능은 회원사 지원 수준에 그쳐 추진력과 집행력을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당장 자기 사업장의 일이 아닌데 투자할 만큼 개별 은행의 시야가 넓지 않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 국내 완성차업계에서 처음으로 자동차산업 노사공동협의체가 결성되고 이 협의체의 사업목적으로 “세계시장에서 국내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고용안정과 인적자원개발을 적극 지원”키로 했지만 아직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하고 기업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형식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노동교육원 황기돈 사무총장은 “사업장 단위에서 교섭의 장기화와 소모적 갈등으로 협력관계의 성숙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를 심화하는 등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며 “산업·업종·지역 단위로 노사가 참여하는 인력개발 정책 마련에 나서야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