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 타국에서 들리는 ‘대한의 노래’
이역만리 타국에서 들리는 ‘대한의 노래’
  • 황호준_국악 작곡가
  • 승인 200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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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버린 조국의 음악으로 한평생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

황호준
국악 작곡가
얼마 전 80세가 넘은 할머니 한 분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큰 절을 올리는 장면이 신문 지상에 보도되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 할머니는 다름 아닌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아내인 이수자 여사였는데,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대통령에게 큰 절까지 올리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실로 눈물겨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눈을 감을 때까지도 고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 후 10년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정치적인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으니 평생을 함께 해온 아내로서 40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감동이 어떤 것인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윤이상, 음악으로 유럽을 울리다

1915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윤이상 선생은 20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음악학교를 수학하고 귀국하자마자 학교에서 음악 교사를 하며 당시로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좀 더 깊이 있는 음악 학습을 위해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시절 윤이상 선생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를 대신해 가족들의 생계를 감당해낸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절절하게 묻어 나온다. 이러한 이유로 윤이상 선생의 유학생활은 더더욱 치열한 음악적 고민과 노력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결국 1959년, 현대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가우데아무스 음악제’와 ‘다름슈타트 음악제’가 윤이상의 작품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선정 해 연주하게 되고, 이어 메이저 음악출판사인 <보테 운트 보크>가 악보 출판 계약을 신청했다. 유럽 음악계는 코리아라는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이 보여준 역량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그는 유학 3년 만에 이러한 어마어마한 성과를 이루어 냈고, 곧이어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유럽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윤이상은 비디오 아트의 대가로 우뚝 서는 20대 후반의 젊은 백남준을 만나게 되는데, 그와는 이미 1년 전에 현대음악 하기강습회를 통해 방을 함께 쓰며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 음악제에서 소개된 존 케이지의 전위적인 피아노 연주에 백남준은 큰 감동을 받았으나 윤이상은 혹평에 가까운 소회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윤이상과 백남준의 예술에 대한 철학의 차이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뒤 도교와 불교, 조선의 궁중음악 등 동양적인 소재를 현대음악적 기법으로 표현한 <바라>, <낙양>, <가사>, <가락> 등의 많은 작품들을 써냄으로써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게 됨과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조국을 위한 작곡가를 무참히 짓밟은 정부

윤이상은 1967년 한국 정부에서 보낸 기관원에 의해 불법적으로 강제 납치된다. 그는 곧장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물고문과 구타 등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하며 간첩 혐의에 대한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34명에게 국가 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사형 등 유죄를 선고한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 사건을 조작했던 정권은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해외의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탄원을 견디지 못하고 2년 만에 대통령 특별 사면 형식을 빌어 형집행 정지로 윤이상을 독일로 돌려보내게 된다. 

 

윤이상은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작곡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요청하여 결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창작을 하는 예술가로서는 최악의 환경이라 할 수 있는 옥중에서 <나비의 꿈>, <율>, <영상> 등 그의 대표작에 속하는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고국 땅을 밟을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봉쇄되어 버린 상황에서 윤이상은 어쩔 수 없이 독일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 <심청>을 비롯, 광주 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등 20세기 세계 현대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윤이상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고국 땅을 밟아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윤이상 음악축제가 기획되면서 윤이상 선생의 귀국을 추진하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정부는 초청편지에다 준법 서약과 사과를 요구한다. 이것은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곡가의 음악적 신념과 자존심을 꺾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처사였다. 결국 윤이상 선생은 고국 땅을 밟아 보겠다는 꿈을 접게 되고 1년 후 세상을 떠난다.

 

과거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독일을 다녀온 지인을 통해 입수한 <광주여 영원하라> 음악을 몰래 듣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제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지만 간혹 냉전논리와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세계적인 대가의 삶을 폄하 하려는 의견을 마주할 때면 이미 지나가버린 20세기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들기도 한다.

 

“서양의 음악사를 볼 때 어느 저명한 작곡가이건, 다 그들의 조국(이 말은 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포괄하는 말로서)에 그들의 예술을 뿌리박고 있다. 대별한다면 이탈리아 음악, 독일 음악, 프랑스 음악, 러시아 음악 등등. 어느 나라의 작곡가도 다른 나라 작곡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귀중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독일 사람이 진정한 러시아 작품을 소화하기는 힘들고 또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동양의 연주가들이 독일의 고전주의 음악이나 낭만주의 음악을 완전히 소화하려 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민족)의 모든 예술적, 철학적, 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 민권 질서의 파괴, 국가 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와 순도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음악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강한 힘이 있는 것이다.”                                                                                                                          - 윤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