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는‘빚잔치’ 정부는‘말잔치’
퇴직자는‘빚잔치’ 정부는‘말잔치’
  • 승인 2005.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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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지원·재고용장려금 집행실적 빵점

 

생존을 위한 기업 구조조정이 일상화되면서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뿐만 아니라 구조조정으로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이들에 대한 대책도 중요한 정책 과제로 부상했다.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전직지원장려금과 재고용장려금 제도다.
하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두 제도 모두 ‘제도를 위한 제도’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무엇이 문제일까.

 

집행률 0.8%의 정부 장려금
전직지원장려금은 기업이 부득이하게 인력감축을 할 경우 감원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재취업교육·창업교육 등을 실시하는 사업주에게 소요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로 지난 2001년 7월부터 시행됐다.


집행 실적을 살펴보면 지난 몇 년간 엄청난 규모의 인력 구조조정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다. 2001년 10억원의 예산이 배정됐지만 실제 집행된 금액은 4천300만원, 혜택을 받은 노동자는 679명에 그쳤다. 그런데도 2002년에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예산이 늘어났다. 집행 실적은 더욱 아연실색이다. 총 배정액 510억 중 4억3천만원만 집행돼 예산대비 집행율이 1%에도 못 미쳤다.

 

2002년의 실패 때문인지 2003년에는 예산이 대폭 줄어 7억6천만 원이 배정됐다. 은행권과 한계기업 등의 구조조정 활성화로 2003년 집행 실적은 80%대에 근접했지만 혜택을 받은 노동자수는 여전히 600명이 되지 않았다.


2001년부터 작년까지 합쳐서 정부의 전직지원장려금 제도의 혜택을 받은 노동자를 모두 합치면 1만2천명 수준이다. 매년 일터에서 밀려 나오는 인원에, 공식적 실업자 77만명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노동부 고용보험과의 관계자는 “홍보도 해 보고 지원금 좀 가져다 쓰라고 해도 매년 실적이 들쭉날쭉이니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교육시설 설립할 돈 있는데 직원 내쫓겠나”
일선 기업에서는 현장에 한 번만 들어와 봐도 알 수 있는 문제를 정부 관계자들만 모르니 답답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2003년 전자제품 생산업체 H사는 구조조정을 앞두고 전직지원장려금 제도를 활용해 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지원방법을 알아보던 이 업체는 이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장려금을 받기 위해서는 전직지원을 위한 별도의 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단서조항 때문이다.

 

이 회사 인사팀 관계자는 “교육시설을 설립할 여유가 있는 회사가 직원들을 내쫓겠냐”면서 “기업현실을 전혀 모르는 제도”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H사는 전체 직원 500명 규모로 그나마 중견 기업에 속한다.

 

중소기업의 상황은 더 말이 아니다. 당장 한두 달치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별도의 교육기관 설립은 꿈도 못 꿀 일. 이런 이유로 중소기업인들은 전직지원장려금 제도를 아예 외면하거나 존재조차 모르는 일이 허다하다.


 

안산에 있는 한 금속업종 중소기업 사장 한모씨는 “정부지원금이라는 게 처음 몇 개월 동안 일부만 지원해 주다가 이내 끊기고 말아 결국 회사가 전부 부담하게 되는 꼴”이라고 말했다. 


 

전직지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지 못한 상황에서 ‘노사의 합의와 전직지원계획서’를 요구하고 있는 단서 조항도 제도 활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현재 노동조합의 경우 전직지원=정리해고 수단이라는 인식 때문에 전직지원제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지난 2001년 경영난으로 300여명의 인원을 감축한 화섬업체 D사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해고자 재취업 교육센터를 설립할 예정이었지만 노동조합의 반대로 결국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회사는 자체 재원으로 센터를 설립했지만 6개월도 못가서 개점휴업 상태가 되고 말았다.

 

평생 실만 만지던 사람에게 컴퓨터 잡으라니
대표적인 실직자 지원 대책인 재고용장려금과 실업자재취업훈련도 실효성이 없기는 마찬가지. 재고용장려금은 고용조정으로 이직한 노동자를 재고용하는 사업주를 지원하는 제도로 지난 97년부터 실시됐다. 이 지원금의 지난해 집행실적은 17.9%에 그쳤고 혜택을 받은 노동자도 58명에 불과했다.


실업자재취업훈련도 일선 현장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제도 중 하나다. 화섬업계의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 중인 구미의 예를 보자.

 

현재 구미지역에서 실시되고 있거나 실시 예정인 실업자재취업훈련 프로그램은 총 7종으로 △건축 CAD 실무 △패션디자인 △보일러취급 △전산세무회계 △정보기술활용전문가 △정보통신설비 △어도비포토샵 등이다. 언뜻 보아도 지역 산업의 특성인 섬유와 관련된 훈련 프로그램은 패션디자인 하나뿐이다. 그나마 패션디자인 과정은 신청 수가 25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평생 실만 만지고 살던 우리네가 갑자기 컴퓨터를 배워서 어느 세월에 취직할 정도로 익히겠냐”는 실직자들의 원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도 시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이 대부분 구미와 다르지 않다.


 

지역별로 업종과 노동시장의 특성, 노동력의 특성이 있는데 천편일률적으로 교육프로그램이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실업자재취직훈련을 찾는 사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이 프로그램을 통한 취업성공 사례는 그야말로 ‘뉴스거리’가 될 정도다.

 

한국노동연구원 정인수 연구위원은 “실제로 산업 현장을 돌아보면 공단별로 교육훈련 요구의 특성이 모두 다른데 전국적으로 획일적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현장 실태 파악을 중심에 둔 실업자 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금융종사자 지원법, 취업 실적 0명
형식적 법령의 남발도 문제다.
2004년 6월 정부와 당정은 IMF 외환위기 당시 퇴출당한 금융기관 종사자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법령을 신설했다. 지원법에 따라 재취업을 신청한 사람이 1026명, 이 중 825명이 대상자로 확정됐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이 제도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놀랍게도 ‘0명’이었다.


경기, 충청, 동화, 대동, 동남은행 등 5개 퇴출은행 연합회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성명을 통해 “자체 파악 결과 지원법에 의해 재취업한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며 “유명무실한 법임이 입증됐다”고 성토했다. 

 

정부는 당초 법 시행 당시 신청자가 3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으나, 신청자부터 예상에서 빗나갔다. 5개 퇴출은행연합회 박대석 전 사무총장은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과 실효성에 대한 의심 등으로 신청자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의심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노동시장 특성에 맞는 지원책 내놔야
구미의 화섬업계와 금융권에서 퇴출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 있는 기술도, 조그만 구멍가게나마 꾸려나갈 비법도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 현장에서 쌓여온 퇴직자들의 전문지식과 기술은 회사문을 나서는 순간 무용지물이 된다.

 

구조조정으로 일터에서 밀려 나오는 이들이 늘어갈수록 실효성 없는 정부대책에 대한 불신도 깊어지고 있다. 제도나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미 고용안정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 지원금만해도 10가지가 넘는다. 여기에다 연초가 되면 넘쳐나는 고용안정대책까지 합치면 제도는 지나칠 정도로 많다.


 

문제는 이들 지원금이나 프로그램이 현장의 수요와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화섬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미지역에서 IT·정보통신 중심의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나, ‘두 명 중 한 명이 닭집 사장님’이라는 금융권 퇴직자들의 현실이 이를 여실히 보여 준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실업대책이 실효성을 거두려면 지역과 업종 단위로 퇴직자들의 특성이 파악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업종에 따라 퇴직자들이 가진 특성과 노동력의 질이 모두 다르고 따라서 이들이 선호하는 ‘미래의 일자리’도 모두 다르다.

 

또, 특정 업종이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경제구조상 지역별로 노동시장의 특성이 뚜렷하다. 오랜 시간에 거쳐 형성된 업종, 지역별 노동시장의 특성과 상관없이 단기적 효과만 노리는 지원금 중심 미봉책이 효과를 거둘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장 중심의 수요 파악과 지역·업종의 노동시장 특성을 접목시킨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