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관행·문화 ‘차이의 벽’이 너무 높다
제도·관행·문화 ‘차이의 벽’이 너무 높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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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경주의 한 외투기업에서는 플래카드 한 장 때문에 발생한 노사 간의 갈등이 외국계 임원과 국내 임원 간의 대립으로까지 번지는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 자동차부품업체인 발레오가 만도기계 경주공장을 매입해 설립한 발레오만도전장시스템스코리아(주) 공장. 임단협 시즌을 맞아 공장 내에서 천막 농성을 하던 노동조합은 ‘노조 무시하는 발레오자본 각성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외국 임원들은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국내 임원들이 ‘한국에서는 임단협 때면 늘 등장하는 하나의 관행일 뿐 큰 의미는 없다’고 설명했지만 프랑스인 CEO 아르백 회장은 ‘프랑스에서 공장 내에 회사 허가 없이 벽보나 플래카드를 부착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며 플래카드를 철거를 지시했다. 노조 간부들이 이에 항의하기 위해 임원실로 몰려오자 외국계 임원이 국내임원에게 말릴 것을 지시했지만 임원들은 ‘괜한 폭력사태만 부를 수 있다’며 지시를 거부했고 결국 CEO는 경찰을 불렀다.

이 일로 국내 임원 13명 중 10명이 ‘프랑스 본국의 지시에만 의존하는 경영관행을 따를 수 없다’며 사의를 표명하기까지 이르렀다. 외국인투자기업의 모국과 우리나라의 노사관계 관행, 문화와 제도의 차이가 빚어낸 하나의 촌극이라고 보기에는 ‘갈등 비용’이 너무 컸다.

본국제도 우선해야 vs 한국제도 따라라

외국인투자기업의 국내 진출이 빠르게 늘면서 갈등의 양상이나 원인도 다양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체교섭제도와 노사관계 관행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이다.


지난 2000년 임단협 결렬로 인해 노조의 파업이 벌어졌던 자동차부품업체 한국게이츠에서는 ‘대체근로’에 대한 노사양측의 시각차이로 파업이 더 장기화됐다.

전세계 17개국에 생산 기지를 확보하고 있는 게이츠사는 노조의 파업으로 납품기일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동일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해외공장에서 제품을 들여와 납품을 했다.


노조는 이에 대해 파업기간 중 대체근로나 외주하청을 금지하고 있는 한국의 노동법에 위배된다고 반발하고 나섰고, 게이츠사는 본국에는 이런 규정이 전혀 없다며 본국 관행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또 회사가 한국적 노사관행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기업공개 제도, 우리사주제, 인사·징계위원회에 노조 참여권 부여 등을 이해할 수 없다며 ‘접근불가’ 입장을 고수하면서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다.


드문 경우지만 투명성이 높은 외투기업의 경영제도나 기업문화 등을 우리 것으로 잘 소화해 시너지 효과를 높인 경우도 있다. 케이블 생산업체인 넥상스 코리아는 임원진에 대한 관리자들의 업무 보고 시 노조 간부 1명이 반드시 참석해 보고를 받도록 노사가 합의했다.


2004년 들어서는 노조위원장이 2개월에 1회씩 경영자 회의에 참석해 생산, 매출, 회계 기술개발 등에 대해 회사측의 설명을 듣고 있어 경영정보에 대한 접근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노조전임자 임금금지, 무노동 무임금 적용 문제 등 노사관계 제도·관행을 둘러싼 갈등은 국내진출 외국기업에게는 거의 ‘통과의례’가 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단순한 사업장 차원의 갈등을 넘어서 외국인 투자기업이 국내의 노사관계 제도에 직접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국내에 진출한 일본 기업 경영자 모임인 서울-재팬 클럽은 지난 9월 산업자원부 장관과의 면담에서 △파견근로자제도 개정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정규직 해고조건 완화 등 13개 분야의 노사관계 제도 개선 사항을 제출하기도 했다.

 

합리주의 vs 온정주의

외국기업의 특징인 ‘합리주의’와 한국기업에서 지배적인 ‘온정주의’가 충돌하는 것도 갈등의 한 원인이다.

지난해 외국사와의 합작을 통해 올해부터 외국인투자기업이 된 T사의 노동조합 간부들은 노무인사팀에 새로운 팀장이 부임한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기별’이 없어서 당황했다. 노무팀 관리자가 바뀔 때면 항상 상견례라는 명목으로 실시되던 ‘접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 노조 간부 K씨는 “회사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빡빡하게 굴면 ‘가족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겠냐”면서 불만을 드러냈지만 회사에서 돌아온 반응은 단호했다. 회사의 규정에 위배되는 어떤 예외적 접대나 회식비용도 지출이 불가하다는 것.


이 외에도 진출 초기에는 한국적 관행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외국인 기업들이 많다. 이들은  명절에 직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선물을 돌리는 문화나 이른바 ‘떡값’ 지불, 무원칙한 휴가 연장 등 원칙보다는 ‘정’을 중요시하는 한국의 기업문화를 수용하지 못해 갈등을 겪거나 비싼 ‘수업료’를 치르기도 한다. 


독일계인 T사의 한 외국인 임원은 “함께 마시고, 식사하고, 개인적인 고충도 나누는 것이 한국의 기업문화를 대표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이제는 비공식적 관계형성보다는 규칙에 입각한 공식적 노사관계가 정착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식적 관계나 원칙의 강화가 오히려 노사관계의 발전에 도움이 된 경우도 있다. LG-OTIS노동조합의 최경호 위원장은 “노사관계에서 원칙 적용이 확실해지면서 임단협 체결 후 약속 불이행으로 인한 재교섭 등 소모적 갈등과 부당노동행위 등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일부 기업에서는 원칙의 지나친 강조가 회사 내 노조 사무실 미제공,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등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지만 일단 노사 간의 논의를 통해 원칙만 잘 손질하면 향후 갈등 소지는 훨씬 줄어들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현지 경영진 vs 본국 경영진

대다수 외투기업에서는 주요 의사결정권이 현지 경영자에게 없다는 것도 갈등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 2000년 한국로버트보쉬(주)에서 일어난 일이 대표적이다. 노조가 한국인 임원들로 구성된 교섭단과 장기간의 협상 끝에 합의안을 도출했지만 결정권이 본국의 경영진에게 있다는 이유로, 협상 체결이 계속 미뤄진 것.


노조는 교섭 전 이미 수차례 회사측 교섭위원들이 실질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공문을 보내 확인했는데도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에 항의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장기화되던 사태는 독일 보쉬사의 작업장 평의회 의장이 한국을 방문해 노조의 입장을 듣고 본국에 돌아가 본국경영진과 협의를 벌인 끝에야 해결됐다. 한국인 부회장은 이 일로 사임했다.


현지 경영진의 결정권 문제는 단지 노사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 생산설비투자, 운영, 철수 등에 관련한 문제의 결정권도 현지 경영진에게 없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부가 투자의 유치에만 골몰한 나머지 투자 이후의 경영권 문제 등에 관해서는 별다른 정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높다.


최근 외투기업의 국내진입은 신규설립 방식이 증가하는 추세로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경영 참여가 가능한 50% 합작 투자의 경향에서 100% 단독투자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때문에 외투기업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본철수’ 카드를 꺼내 들어도 현지 경영진은 속수무책이다. 이로 인해서 직원들 사이에서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 떠날 기업’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애사심과 몰입도의 저하로 이어지고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된다.


외투기업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외투기업 노사관계 관련 정책이 부족한 것도 불만이다. 외투기업의 분규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자본철수론’이 빈번히 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정부가 외투기업 노사관계에 대한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장기 분규로 인해 본국에서 철수론이 제기되고 있는 한국 테트라팩의 최준호 공장장은 “외투기업의 노사관계는 이제 막 형성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노사 당사자의 성숙한 자세만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공정한 심판자의 역할을 하고 외투기업 노사관계에 대한 정책 접근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외투기업 노동조합 전문성 키우자

노동조합의 외투기업 특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정책적 능력 부족도 노사갈등에 한 몫을 하고 있다. IMF 이후 외투기업 유치가 급격히 늘면서 노동조합이 외투기업의 특성에 대해 이해하고 학습할만한 기회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다국적 특송·하역업체인 Fedex코리아 인사팀 이주표 차장은 “외국 기업의 경우 정보공개와 제안회의 등이 국내기업보다 훨씬 활성화되어 있는데도 노동조합의 이해 부족으로 참여가 저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식적 통로를 통해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과거의 관행대로 비공식적 협조를 구하는 노조의 행태가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도 이러한 지적에 일면 동의하는 분위기다. 한국노총 화학노련 외투기업특별위원회(준) 의장을 맡고 있는 한국 베링거잉겔하임 양환용 위원장은 “노동조합에 다국적 기업의 이념과 현지의 언어, 문화, 제도 및 관행의 차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노사전문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외국자본 유치에 대한 찬반을 떠나 이미 국민경제와 노사관계의 축으로 자리 잡은 외투기업에서 노동조합의 정책능력 제고를 통해 올바른 노사관계 관행 확립과 외투기업의 정책에 대한 감시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