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임금제도 개편 논의 ‘솔솔’
노동계, 임금제도 개편 논의 ‘솔솔’
  • 참여와혁신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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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요구율 산정기준,
임금교섭 방식도 수면 위로 떠올라

2004년 노동시장의 가장 큰 이슈는 무엇보다도 ‘양극화’와 ‘고령화’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노동자와 중소기업노동자 간의 임금·처우의 차이, 생산인력의 고령화와 이에 따른 임금비용 증가, 고령 노동자에 대한 퇴직 압력 확대 등은 노사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골칫거리’다. 원인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이해집단별로 모두 다르지만 해법을 논의할때 마다 ‘임금 체계의 개선’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연공서열 중심의 경직적 임금제도가 노동시장 내부의 격차를 더 벌리고 고령노동자의 노동시장 퇴출을 촉진한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된 것이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노동계도 더 이상 이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대안적 임금체계 모색하자”

지난 12월 민주노총이 주최한 ‘2005년 임금정책 토론회’에서는 연공급 중심의 임금 제도 개선이 노동시장 내 격차를 줄이는 유력한 방안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노동시장 내부 격차 확대의 책임이 전적으로 노동계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노동계도 노동소득 분배구조를 개선하고 임금격차를 줄이는 ‘연대임금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숙련에 중심을 두는 임금체계가 교육 훈련과 연계되면 노동자의 자기계발을 촉진, 노동시장 내에서 노동자의 지위와 생활수준을 높이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는 “연공급 체계의 한계는 이미 90년대 초부터 드러났고, IMF를 거치면서 더욱 부적합한 임금 체계가 됐다”면서 “노동계가 주장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하에서 봐도 연공급보다는 숙련에 중심을 둔 임금이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가 등장하기는 했다고 해도 올해 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기획실장은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산별노조와 기업별노조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총연맹 차원에서 논의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면서 “내년에도 민주노총 차원에서는 생계비 기준으로 임금 요구율을 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민주노총의 2005년 임금정책을 결정하는 기초 토론의 성격이 짙어서 더욱 관심을 모았다. 그간 산별연맹을 중심으로 노동계 내에서도 드문드문 논의가 있기는 했지만 총연맹 단위의 임금 정책 토론회에서 공식적으로 임금체계 개편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동배 연구위원은 “노동계의 참여가 없는 임금체계 개편 논의는 실효성이 전혀 없다”면서 “노동시장 내부의 격차 완화와 새로운 경제·노동시장 환경에 맞는 임·직급 체계 마련을 위해 노동계의 적극적 논의가 필수적”이라고 제안했다.

 

임금 인상 기준, 생계비냐 생산성이냐

매년 임단협 시즌이 되면 노동계와 재계는 임금 인상 요구율을 놓고 힘겨루기를 한다. 현재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표준생계비’를 기준으로 임금 요구율을 산정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자총협회는 ‘양 노총의 임금 요구율 산정 기준인 표준생계비 기준이 이론생계비 방식을 택함으로써 품목이나 수량 설정에서 작성자의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며 노동생산성과 국민경제성장률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대 노총은 ‘오히려 경총의 임금 방침이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밑도는 임금을 강요한다’고 반박한다.


임금 산정 기준에 대한 ‘지리한 논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반복된다. 때문에 두 안을 모두 검토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노동시장 내부의 격차를 반영하는 ‘노동소득 분배율’을 기준으로 ‘경제성장률+물가상승률’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일선의 노동조합 간부들 사이에서도 합리적 임금 인상 기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연초만 되면 노조 정책 담당자들은 임금 인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자료 수집에 애를 먹다 결국에는 별 기준 없이 상급단체의 요구율을 적당히 따르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며 합리적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임금체계 개편과 맞물려 빠지지 않는 이슈에는 교섭구조에 관한 것도 있다. 기업별 노조 중심의 교섭구조에서는 동종 업종 정규직 비정규직 간, 대기업-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금속산업연맹 노재열 정책실장은 “연공서열 이외의 요소를 임금 결정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산업별 숙련평가, 교육훈련위원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산별교섭 체계 정착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체계 개편 논의를 꼭 산별교섭과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보건의료노조 이주호 정책기획국장은 “산별노조 체제 하에서만 임금체계 개편을 논의할 수 있다는 논리는 자칫 ‘산별 만능주의’와 연결될 우려가 있으므로, 현재의 교섭 체계 내에서 가능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이 논의를 산별노조 형성의 촉매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배팅부터 하고 보자?

최근 들어서는 임금교섭 과정과 행태가 임금 체계의 경직성과 노동시장 내부의 임금 격차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노사 양측의 임금 요구안 산정 기준이다. 노조와 사용자 모두 임금교섭 초기에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안을 제시해 불필요한 교섭비용과 기간을 소모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별 기업에서의 임금협상에서 노사는 서로 ‘깎이고 깎을것’을 예상해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율을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규모 제조업 사업장인 A사 노조는 올해 임금교섭에서 민주노총이 제시한 임금요구율인 10.5%의 인상율을 제시했다. 회사는 1차 제시안으로 3.2%를 제시했다. 양측의 제시안 차이가 거의 3배에 가까웠다. 최종적으로 타결된 인상률은 6% 수준이었다.


이 회사의 노조간부 K씨는 “노조는 협상과정에서 깎일 것을 예상해서 처음에는 조금 높게 인상안을 제시하고 회사는 처음부터 낮은 인상안을 내놔야 나중에 생색내면서 처음 제시안보다 높였으니 최선을 다한 협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이 간부는 이러한 교섭 행태가 다른 기업에서도 일반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5월에 시작된 이 회사의 임금교섭은 17차까지 계속되다 8월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처럼 노사 양측의 비합리적인 임금 제시는 교섭 기간을 늘리고 이에 따른 갈등과 비용을 유발시키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안주엽 연구위원이 2003년 임금교섭을 진행한 759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노조와 사용자의 초기 임금교섭 시 제시한 요구율의 격차가 7.1%포인트에 달했고, 1000인 이상 사업장의 격차는 7.8%포인트로 30인 미만 사업장의 6.0%포인트보다 높아 대기업일수록 교섭 초기 노조와 사측의 임금인상안 격차가 심했다.

교섭기간과 횟수는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이 67.3일과 8.9회, 한국노총 사업장은 53.6일과 5.9회로 조사됐다. 이에 비해 상급단체가 없는 사업장은 교섭기간이 18.9일로 3분의 1 수준이었으며 교섭횟수도 2.7회에 그쳤다. 반면 최종 임금인상률은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 6.7%, 무소속 6.4%, 한국노총 소속 6.3%로 큰 차이가 없었다.

 

경제논리 앞서는 힘의 논리

임금교섭이 합리적 기준제시와 논의과정보다는 노사 간의 ‘힘겨루기’로 진행된다는 지적도 높다. T사의 노무팀 관계자는 “노사 모두가 명분으로 내세우는 임금 인상의 근거와 실제로 타결에 영향을 미치는 기준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은 표준생계비와 동종업계 임금 수준을 논리로 제시하지만, 이는 명분일 뿐 상급단체의 요구율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고, 회사 역시 생산성이나 경상이익을 기준으로 제시하지만 ‘전체 운영비에서 인건비를 몇 %대로 유지한다’는 원칙이나 동종업계의 인상 분위기 등을 봐가며 그때그때 인상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임금교섭이 시작된 지 꽤 지나서야 회사측의 인상안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 17차 교섭 끝에야 임금교섭을 마친 A사의 경우 회사가 인상률을 제시한 것은 15차 교섭 때였다. 15차 교섭까지 노조는 회사의 ‘불성실 교섭’을 규탄하며 쟁의행위 찬반투표 직전까지 갔고, 회사는 매 교섭 때마다 협상안은 제시하지 않고 노조의 안만 문제 삼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이런 교섭 행태가 매년 반복되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회사로서는 막판까지 기다리면서 동종 업계 임금교섭 진행상황이나 조합원 여론을 파악해 인상안을 제시하는 것이 더 유리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결국 노사 양측 모두 ‘경제적 근거’를 내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타결은 정치적 협상력과 힘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국노동혁신연구소 전경미 연구위원은 “노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극단적 대립과 정치적 거래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며 “임금 교섭과정의 낭비 요소를 줄이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고령화의 진전과 경제 성장 방식의 변화로 저임금 고도성장기에 등장했던 연공급의 한계는 빠르게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노동자 간 격차는 노사 간의 갈등을 넘어 사회 갈등의 요소까지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공급 중심의 경직된 임·직급 체계는 고령화와 노동시장 격차 뿐 아니라 기업 경쟁력에도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 변화와 혁신이 핵심 요소가 된 경제 환경 속에서 인적 자원의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지만 자동승급과 연령을 기준으로 하는 연공급은 노동자의 능력개발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동배 연구위원은 “기업이 일상적인 혁신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혁신적 업무체계와 이를 지원하는 임금체계 개편이 필수적”이라면서 “임금결정의 양 주체인 노사가 새로운 임금체계 마련과 합리적 임금교섭을 위한 논의에 나서는 것이 시급하다”고 제안했다.


그동안 지루하게 반복된 노사의 ‘책임 떠넘기기’를 넘어 현실적인 대안 마련을 위한 논의를 서두를 때라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