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의 삶, 그 뿌리는 깊고 습하고 어둡다
영화인의 삶, 그 뿌리는 깊고 습하고 어둡다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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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영화스텝, 그 꿈은 어디로

“요새는 구슬 꿰기 같은 일도 없더라구요. 사실 인형 눈이라도 틈틈이 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는데 가끔 월세라도 좀 보태줘야 그나마 눈치가 덜 보이죠. 하하… 영화 촬영하면 시간을 정해서 움직이는 아르바이트는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틈틈이 할 수 있으니까, 하면 차비라도 나올 것 아닙니까.”

 

연출부 촬영스텝으로 일하는 김규성(가명·28세)씨를 만난 것은 그의 사무실 근처에 있는 한  다방이었다. 이름도, 성도, 여태껏 해 왔던 작품조차도 밝힐 수 없다고 한 그는 인터뷰하는 것을 며칠 동안이나 망설였단다.


가장 큰 이유는 가뜩이나 경기도 어려운데 우리의 영화산업에 자신의 발언이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갸륵한 생각’이다. 둘째는 한 치 건너 이름만 대면 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나오는 판에서 이름이 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 판에서는 내가 작품 네 개 했는데 다섯 개 했다고 하면 그 다음날 뽀록나는 곳이에요. 기자님이 내 이름을 이니셜로 넣는다고 해도 알아낼 수 있는 힌트가 요만큼이라도 들어가면 그걸 보면서 찾을 수 있다니까요. 정말이에요.”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겠다는 확실한 다짐을 받고 나서야, 그는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영화가 중간에 ‘엎어지는’ 거죠. 그것도 한 80% 이상 촬영이 진행된 후라면 더욱 가혹해요. 그동안 받을 돈을 생각하면서 썼던 돈이나 여태껏 써 왔던 핸드폰 요금을 감당할 수 없어지는 거예요.”

영화 스텝들은 대개 선금, 중도금, 잔금의 형식으로 돈을 세 번으로 나누어 받는다.


물론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어 있는 감독, 그리고 스텝 중 가장 서열이 앞서는 ‘퍼스트(First)’급은 일시금을 지급받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나누어 받는 것이 오랫동안 사제 관계의 형태인 도급제로 임금을 지급해 온 관행이다.

 

평균연봉은 640만원

이들의 관행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이다. 예외는 어디서나 존재하긴 하지만 각 부 감독이 영화 제작 시점부터 완료 시점까지 일정한 금액을 받아 그 50%를 가져가고 그 아래 퍼스트가 남은 금액의 50%, 그 아래 스텝이 다시 50%를 가져가다보면 막내급 스텝에게는 약 250만원에서 많게는 400만원 정도의 금액이 떨어진다.

6개월을 평균 촬영 기간으로 봤을 때 이들의 평균 월급은 많아봐야 50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국감에서 환노위 소속 열린우리당 김영주 의원이 영화제작 종사자 15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 영화 스텝들의 평균연봉이 640만원이고 4대 보험 가입률은 절반 수준인데다 일일 노동시간이 13시간을 넘는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김규성씨의 생각은 ‘이해한다’는 거였다.

“제작을 하다가 제작비가 딸리면 결국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인건비밖에 깎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죠. 장비 대여를 안 할 수 없는 것이고, 기술자를 부르지 않을 수도 없고, 결국 스텝들을 굶기거나 돈을 깎을 수밖에 없다는 결과가 나와요. 사람이 많아봐야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 없는 거고 우선 카메라가 있어야 하고 조명이 있어야 하죠. 돈이 없으면 뭘 제일 먼저 뺄 것 같아요? 다른데도 마찬가지죠 뭐.”


그는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에 대해 ‘길들여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품을 하다보면 ‘야, 나는 옛날에 임마, 한달에 5만원 받고 일했어. 자식아’, ‘영화하는 놈이 돈을 따지냐. 작품을 먼저 생각해야지’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요. 그러면 할 말이 없어지죠.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그러란 법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이 고생하면서 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발전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잖아요.”


이런 대우 속에서도 그의 관심사는 적은 임금이나 과도한 노동시간 개선보다는 영화의 질적 향상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국산 장비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카메라 하루 빌리는데 50만원이면 거의 한달 월급을 쏟아 붓는 거죠. 이런 거품을 빼야 할 것 같아요. 제일 힘든 건 촬영 중에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될 때죠. 섭외한 장소가 당일날 펑크날 때나 구경꾼들을 제대로 제어 못해서 배우 감정 깨지고 아까운 필름 날아갈 때 제일 죄송스럽고 힘들어요. 그것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죠. 몸이 힘든 거야 뭐, 늘 그랬으니까 괜찮아요. 단지, 발품을 팔면서 영화 일을 구하러 다닐 때 보면 이미 사람을 구해놓고 형식적으로 면접을 보는 경우가 있어요. 기다리는 사람은 피가 마르는데 그러면 안되죠.”


그는 힘든 삶 속에서도 곁눈질은 하지 않는다. 앞으로 영화에 다뤄지지 못한 매력 있는 캐릭터와 탄탄한 시나리오를 가진 작품의 감독이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아직까지는 한 작품 끝나면 다음 작품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하는 하루살이 인생이지만 열심히 노력한 만큼 언젠가는 나도 우뚝 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화려한 영화의 뒤켠 

지난 2001년 대종상 시상식이 열리던 날, 화려한 조명 아래서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붉은 융단을 걸어가는 연예인들의 뒤에 몇 명의 초라한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못살겠다’는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화려한 영화의 뒤켠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던 10여 명의 스텝들이었다. 참다 참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비둘기’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 영화 스텝들의 부당한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적이 있다. 그 글들은 동감어린 리플과 또 다른 고발들로 이어져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비둘기’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은 현재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광호씨. 그리고 현재는 97년에 부산에서 올라와 스텝으로 일하며 끊임없이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해 온 고병철씨(35세)가 바톤을 이어받아 ‘비둘기둥지’라는 사이트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영화 스텝 4부(연출, 제작, 촬영, 조명)와 함께 영화인 신문고까지 개설해 운영하면서 부당한 사례를 대화로, 또는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소위 가족적이라고 하는 영화산업 내에서 왜 스텝들은 영화의 위험성만을 함께 떠안고 가야 되고 대박이 나면 찬밥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까?”

얼마 전 신문고에 이름난 G엔터테인먼트 C씨가 60여만원의 임금을 10개월째 체불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이를 접수한 고병철씨는 사장 C씨를 만나 임금 지급을 요구했다.


그 후 한 달만 기다리면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C씨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줄텐데 신고까지 한 놈이 괘씸해서 줄 수가 없다”며 태도를 바꿨다.


한 제작자는 거액의 돈을 들여 촬영했던 영화가 망하자 파산신청을 한 후 현재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인 모 영화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개인 재산에 손을 댈 수 없는 스텝들은 돈을 받지 못한 채 아직도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고충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수법을 쓴 사례죠. 특히 도중에 영화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사가 파산신청을 하면 도리가 없어요. 이제 법적 대응을 해 나갈 겁니다.”

 

영화 진흥법 개정 움직임

이제는 오히려 그가 걱정스러워진다. 선배이자 아버지이자 ‘오야지’인 ‘윗분’들에게 찍혀 입봉(감독 일을 맡는 것을 뜻하는 은어)이고 뭐고 당장 영화 일을 못하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고병철씨는  “오히려 다시는 같이 일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알게 돼 이득”이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될 것이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킨다.


이런 그도 역시 좋은 영화판의 감독을 꿈꾸는 ‘영화인’이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4년째 국감 때마다 다뤄지는 영화 스텝 처우개선 문제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물론 영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영화 진흥법을 개정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영화진흥위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작지만 소중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제작사도 고충이 있어요.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한 고위험과 고소득의 경계인 이쪽에서 일하는 누구나 그건 마찬가지죠. 우리는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제작 시스템과 안정된 환경을 요구하는 겁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기쁨은 혼자 다 가지고 절망만 나누려고 하는 건 말이 안되니까요.”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이게 카드사 번호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는 그의 힘든 삶이 젊고 패기 있는 진정한 ‘영화 예술인’의 모습을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영화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대중에게 알려진 ‘스타급’ 제작자들의 아이디어와 한국 영화의 힘은 그들만의 공은 아닐 것이다. 하나 둘씩 지쳐 쓰러져가는 ‘젊은 비정규직’들도 당당한 주체다.


화려한 영화와 스포트라이트의 뒤편. 깊고, 습하고, 어두운 흙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생존권’을 살피는 일은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