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8.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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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다, 태안
검은 기름과 섞이지 못하는 눈물과 울분

서울 새벽공기를 가르고 출발한 버스는 3시간 정도 달린 뒤에야 태안바다를 만났다. 유의사항이 적힌 유인물과 방제복이 먼저 방문객을 맞았다. 유의사항이 전해주는 비장함에 순간 오싹해진다. “군 작전명령 받고 전쟁터에 투입되는 것 같다”는 누군가의 말이 너무나 공감되는 순간이다.

 

우비에다 장화, 방제복까지 단단히 껴입고 두려움과 비장함까지 안고 겨울 태안바다와 마주했다.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바다를 휘감는 무거운 침묵. 오직 매서운 겨울바람만이 침묵을 깬다. 밀려오는 냄새에 현기증이 난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아니라 역한 기름 냄새다.

  

색깔을 잃어버린 태안
썰물이 빠져 갯벌이 펼쳐진 바닷가 자갈밭은 온통 검은빛이다. 돌멩이, 자갈이란 한 이름으로 살아야했지만 각각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자갈들로 이뤄졌던 바닷가는 더 이상 없다. 그곳은 오직 검정 한 가지색만 허락된 듯 하다.

흡착포를 손에 들고 바위와 돌멩이에 뒤덮인 검은 기름을 닦아내고 또 닦아낸다. 검은 기름을 닦아내자 돌멩이 본래의 색깔이 햇빛에 비춰 반짝거린다. 살면서 한 번도 신경 써보지 않았던 태안 어느 바닷가의 돌멩이 색깔. 그 색깔이 이토록 반가울 때가 살아생전에 또 있을까. 마치 어릴 적 검은색 크레파스를 벗겨내 그 속에 숨겨진 알록달록한 색깔들을 찾아내던 미술시간처럼 태안을 덮은 검은 기름 속에서 태안반도의 본래의 색깔 찾기에 사람들의 손이 바쁘다.

  

검은 기름, 이렇게 가슴 먹먹하게 하는 것이었나
누군가 “일할 땐 노래도 부르면서 흥겹게 해야 해”라며 흥을 돋우려 해보지만, 반응은 겨울바다 바람처럼 차갑기만 하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대재앙 앞에서 인간은 할 말이 없다. 침묵 속에서 여기저기 신음 같은 한숨소리만 흘러나온다.
“이게 뭡니까. 아주 울화통이 터집니다, 터져.”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
“이건 전쟁이에요, 재앙입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답답합니다.”

 

그날 태안바다에는 풍랑특보가 내려져 서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강풍이 불었다. 바람막이 하나 없이 드넓은 태안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어머니의 회초리만큼 매섭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춥다는 불평 없이 묵묵히 바람을 받아 안으며 기름을 닦아낼 뿐이다. 하얀 흡착포는 줄어들고 기름으로 뒤덮인 검은 흡착포는 늘어가건만 바닷가 자갈밭은 여전히 검다. 닦아내야 할 자갈 수에 비해 사람의 손은 턱없이 모자라다. 인간의 한 순간의 실수가 만들어낸 재앙에 가슴이 먹먹하다.

 

ⓒ함지윤 기자jyham@laborplus.co.kr
자연 앞에 인간이란 게 부끄럽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철퍼덕 땅바닥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태어나서 땅바닥에서 밥 먹는 건 처음”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아무도 불평은 하지 않는다. 모두들 말을 잃어버린 듯 식사시간조차도 조용하다. 하루해가 짧은 겨울이라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조차 많지 않다. 작업을 끝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자갈밭은 도대체 오늘 한 게 무어냐고 비웃듯 여전히 온통 검은빛이다.
 

그나마 오늘 기름 걷힌 얼굴로 세상을 만났던 돌멩이들도 내일이면 밤새 밀려온 기름으로 다시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반복을 얼마나 해야 하는 것인가. 아침엔 똑바로 바라봤던 바다를 돌아오는 길엔 차마 바라볼 수 없다. 바다는 컴컴한 어둠 속에 남겨둔 채 인간들만 밝은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죄스러울 뿐이다. 

 

돌아오는 길,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달라는 목소리에 도시가 들썩인다. 자신이 벌여놓은 일조차 수습 못하면서, 그렇게 다른 생명의 숨통을 조이면서, 그래도 서로 잘났다고 으스대는 인간이란 것이 부끄럽다. 어찌 인간은 이리도 우매하던가.

손길 필요한 그곳에 노동조합이 있었다
 

함께 고통 나누기 위해 팔 걷어붙여

사고를 낸 사람들은 서로 잘못이 없다며 책임공방을 펼치고 있을 때 전국의 수많은 국민들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태안으로 몰려왔다. 한순간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과 함께 아파하며 검은 기름을 걷어내고 닦아냈다. 그리고 그곳엔 노동조합과 노동자가 있었다.  

 

한국노총,
태안반도 곳곳에서 기름제거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 7일째인 지난 12월 13일,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을 비롯한 산하 연맹과 단위노조 조합원 1천여 명은 태안반도를 찾아 대규모 굴 양식장이 있는 소근리 해안가 등 태안반도 곳곳에서 방제작업을 펼쳤다.

  

어민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해온 금융노조 수협중앙회지부는 기름유출 사고 이후 전 조합원들이 매일 조를 나눠 방제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은행지부도 하루 200명씩 60일 동안 복구작업을 펼치고 있다.

 

이날 인근 학암포에서는 국립공원관리공단노동조합 조합원 500여 명이 1박2일 동안 작업을 진행했고, 피해지역과 1사1촌을 맺고 있는 담배인삼노조 조합원 50여 명도 14일까지 복구작업을 계속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다”며 “더 많은 조합원들이 태안을 찾아 복구작업에 힘 써달라”고 당부했다.

  

현대중공업노조,
2박3일 기름과의 사투
오종쇄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간부, 대·소위원 240여 명과 조합원 150여 명 등 390여 명의 현대중공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지난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3일 동안 태안반도에서 방제작업을 펼쳤다. 특히 현대중공업노조는 인력부족으로 사람들의 손길이 전혀 닿지 못했던 신두리 북쪽 암벽일대에 기름을 제거했다. 또 14톤급 굴삭기 1대와 휠로더 1대를 태안군청에 기증했으며, 작업복과 세척제, 비닐 테이프, 마대 등 작업에 필요한 물품도 함께 지원했다.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은 “어려운 이웃을 도와 모두가 발전해야 한다는 노동조합의 이념에 따라 방제작업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교조, 아이들과 함께 태안바다 되살리기
전교조도 지난 12월 20일 태안 구름포 해수욕장 일대에서 학생들과 함께 방제작업을 전개했다. 이날 50여 명의 조합원들과 학생들은 해안 주변과 바위 등에 묻은 원유 찌꺼기를 걸레로 닦아내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진행했다. 이미 전교조 충남지부는 지난 14일 수능을 마친 예산여자고교 고3 수험생 50여 명과 함께 십리포 해수욕장에서 방제작업을 펼치기도 했다. 전교조는 각 지부에서 자원봉사활동시 물품보관, 연락장소, 식당 등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십리포 해수욕장에 운영본부 천막을 설치해 2008년 봄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정애순 대변인은 “환경·생태계의 문제는 전교조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참교육의 한 부분”이라며, “지속적인 삶을 살기 위한 방식들을 교육하는 계기”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전교조는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와 관련한 계기수업을 진행했다.

  

기아차지부·대우차지부, 태안에서 구슬땀 흘려
기아자동차지부는 지난 15일 조합원 500여 명과 함께 기름으로 뒤덮인 태안반도를 찾아 꾸지나무골 해수욕장 일대에서 기름제거 작업을 진행했다. 기아자동차지부는 최악의 해상오염이 발생한 것에 대해 “대공장 노동조합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참여하게 됐다고 전했다.

 

 GM대우자동차지부도 2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해 지난 18일 천리포해수욕장 인근 해안가에서 방제작업을 펼쳤다. 2주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기름제거 작업이 일부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인력부족으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여전히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여 있다”고 방제작업에 참여한 노조간부는 전했다. GM대우차지부는 이러한 활동으로 “노동조합 간부들의 이미지 제고와 더불어 회사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는데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예전 태안반도로 돌아오기까지
노동계 무엇을 할 것인가

12월 7일 오전 7시경 충남 태안군 만리포 북서방 5마일 해상에 정박 중인 15만t급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삼성중공업 소속 해상크레인이 추돌했다. 이 사고로 원유 1만247㎘가 바다로 흘러들었다. 서산 가로림만에서 태안 안면도까지 167km의 해안선이 기름에 오염됐다. 유조선에서 쏟아진 기름은 수십만명의 자원봉사자들 손에 의해 조금씩 수거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답답하다. 비단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검은 기름의 흔적 때문만은 아니다.

  

사고치는 놈 따로 있고
수습은 국민들 몫?
태안 기름유출 사고 이후 뉴스와 신문의 대부분은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가 장식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등 휴일까지 반납하고 태안에서 검은 기름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며, 섬지역 등 외진 곳의 방제작업을 위해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연히 발 벗고 나서야 되지만 이런 풍경이 처음은 아니란 사실에 사람들은 화가 난다고 말한다. 사고 친 사람들은 모른 척 하고 매번 수습은 국민들이 한다는 이야기다. IMF 경제위기 당시에도 끼고 있던 금반지를 내놨던 것도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국민들이었다.

 

이번 태안 기름유출 사고도 마찬가지다. 사고 발생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사고발생 원인과 책임소재가 밝혀지지 않았다.
또 사고 발생의 당사자인 삼성중공업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태안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일부에선 “왜 잘못도 없는 국민들이 가서 고생하냐”며 “삼성그룹 계열사의 전 직원이 가장 먼저 방제작업에 나서야 되는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해낸다. “태안에서 거둬들인 기름을 삼성그룹 본사 건물에 뿌리면 전 직원이 나서서 건물을 닦을 것”이라며 방제작업에 소극적인 모습을 비꼬기도 한다.

제로 수준의 방제시스템과 사고선박을 무려 48시간 동안 방치한 정부의 늑장 대응도 문제가 되고 있다. 조합원들과 태안을 찾아 기름제거 작업을 하던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국가적 차원의 방제시스템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다”며 성토했다. 이미 1995년 여수에서 발상한 ‘씨프린스호’ 원유유출 사고를 경험했음에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고발생에 대한 예방과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답답함은 더해간다.

  

희망 찾기 위해 노동계 적극적으로 나서야
이번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태안바다는 어둠에 갇혔다. 굴 양식장은 제철을 맞아 제대로 한 번 따보지도 못하고 기름범벅 폐허로 변했다. 한순간 삶의 터전을 빼앗겨버린 주민들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태풍 등 자연재해 때문이라면 하늘의 뜻인가 보다며 내년 농사를 준비하겠지만, 사람이 만든 재앙 앞에서 더 이상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된 주민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내 살아생전에 여기가 옛날같이 깨끗해지는 것 볼 수 있겠어”하는 어르신들의 주름살은 더 깊어 보인다. 인간의 한순간 실수가 빼앗은 것은 단지 굴을 팔아 벌 수 있는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의 내일에 대한 ‘희망’이다. 따라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도 태안의 아름다운 풍경뿐만이 아니다. 우리 이웃의 ‘희망’도 찾아내야 한다.

  

당장 더 많은 사람들이 태안반도를 찾고 방제작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태안지역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연대를 통해 우리 이웃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데 노동계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이 서로를 돕고자 하는 마음과 행동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이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등 노동계도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관철시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더 이상 노동조합이 사회적 약자만은 아니다.

 

이젠 노동계가 또 다른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 노동의 일터만 다를 뿐 태안의 그들 또한 노동자이다. 한 노조 간부는 “적극적으로 한미 FTA 반대투쟁을 한 것처럼 서해안 기름유출 사건에 대해서도 노동계가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전교조 정애순 대변인은 “유출사고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타이어 등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이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노동계가 작업환경 등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기업들이 이윤추구 뿐만 아니라 생태적인 삶을 만들어 나가도록 적극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들 사고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정부가 늑장대응을 했다고, 방제시스템이 엉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정 희망을 잃어버린 태안지역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작다. 노동계가 이에 대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