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계절’ 잊혀진 .조.합.원.
‘선거의 계절’ 잊혀진 .조.합.원.
  • 참여와혁신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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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정책 대결

중병 걸린 선거문화에 똬리 튼 ‘노동조합 권력화’

연말이 되면 각 기업의 노동조합과 상급단체는 한해의 사업 평가와 다음해의 계획 수립에 들어간다. 노동계의 연중사업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11월 전국노동자대회가 끝나면 사실상 대외적인 활동을 마무리하고 내부 체제 정비와 사업계획 수립을 위한 ‘동면’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2∼3년 주기로 치러지는 노조의 위원장 선거를 맞게 된 곳은 연중 가장 바쁜 때가 바로 이때다. 특히 지난 연말에는 민주노총의 ‘빅3’로 불리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공운수사회서비스연맹, 금속산업연맹을 비롯, 주요 기업 노동조합의 임원 및 대의원 선거가 많았다. 또 올들어서는 금융산업노조, 한국노총 임원 선거 등 굵직굵직한 선거들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다.


여느 선거와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선거에서도 ‘공정성 시비’, ‘조합원 배제’, ‘조직 동원’, ‘정책 실종’ 등의 문제가 불거진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인 조직 중 하나로 꼽히는 노동조합, 그러나 지금 노동조합 선거는 몸살을 앓고 있다.

 

총파업 속 ‘물밑 작업’

 

지난 11월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에서는 비정규직 입법 반대를 위한 총파업 찬반투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때, 총파업 투표 준비에 분주하던 청주의 C기업 노조 간부에게 평소 친분이 있던 소속 연맹의 간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저녁에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총파업에 관한 현장의 반응이 적극적이지 않아 고민하던 노조간부 J씨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생각으로 약속장소에 나섰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대화의 주제는 총파업 투표율에 관한 것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결국 총파업 투표율이 지지부진한 것은 연맹 지도부의 취약한 지도력을 보여준 것이라며 12월에 있을 연맹 선거에서 특정 후보지지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낸 것.


J씨는 “총파업 성공을 공언했고, 이를 위해 뛰어야 할 사람들이 한달이나 남은 선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말이 돼냐”고 일축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문제제기를 하려 했지만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J씨는 12월에 열린 연맹 임원 선거에서 기권을 택했다.

 

이런 일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지난해에는 공교롭게도 선거시기와 총파업시기가 겹치면서 문제제기가 더욱 잦았다. 때문에 한 연맹에서는 중앙위원회를 열어 선거 시기를 총파업 이후로 연기하기도 했다. 총파업에 집중하고 더 많은 조합원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후 열린 연맹 선거에서도 조합원의 관심과 참여는 저조했다.


이 연맹의 한 관계자는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조합원은 쏙 빠진’ 노조운동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 달여의 선거운동기간 동안 후보자들은 조합원을 대상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유권자인 ‘대의원’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한다. 현장의 조합원 대다수는 연맹 선거에 어떤 후보가 출마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선거가 끝난다.


그나마 각 사업장 노조의 조합원을 대표해 유권자 자격을 부여받은 파견대의원들도 정책보다는 조직적 이해관계와 친분 등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는 것은 노동계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실제로 선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연맹의 후보자 정책 토론회에는 전체 유권자의 10% 가량밖에 안 되는 30여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정책 토론회에서 만난 K사 노조의 파견 대의원 L씨는 “현장 조합원들은 정책 토론회를 하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며 “결국에는 어떤 정책을 내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자파 대의원을 ‘확보’하느냐의 조직동원력이 선거 승리의 관건”이라고 전했다.


법정까지 간 노조위원장 선거

 

2004년 12월 23일,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인 K사의 본사 로비.


선거대책본부 사무실에 있어야 할 후보자 한 명이 까칠한 얼굴로 담요를 펴고 앉아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날로 농성 7일째를 맞은 B씨는 1차 투표에서 32.6%(2위)를 득표해 36.1%((1위)를 득표한 다른 후보와 2차 결선 투표를 하게 되어있었지만 개표 직후 선관위로부터 3차경고와 동시에 ‘누적경고 3회에 따른 자격박탈’을 통보받았다.


자격박탈이 확정될 경우 본래 1,2위 후보간 2차 투표가 사실상 1위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로 바뀌게 된다.


B씨 진영은 경고 절차상의 적법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차경고는 통보 후 30분만에, 3차 경고는 10분만에 이뤄졌기 때문에 선거규칙에 명시된 ‘경고 시 충분한 소명자료제출 기간 부여’라는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B씨 진영의 선거사무장 L씨는 “경고를 할 일이면 투·개표 전에 할 것이지 개표가 끝난 후에 경고를 하는 것은 선관위가 특정후보를 밀고 있다는 의혹을 사실로 입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선관위 관계자는 “경고의 시점에 대한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며 “경고를 할만한 일이 있으면 개표 후에라도 당연히 경고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맞섰다.


파행을 거듭하던 선관위는 결국 2위 후보 자격박탈을 확정했고 B씨 진영은 결정에 불복해 법원에 선거 중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노동조합 선거가 법정으로 가는 것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고 있다. 몇 해 전 D사에서는 무효표 처리 문제를 놓고 3차에 걸친 재검표 과정을 거치면서 노조 자문변호사까지 개표에 참여했지만 결국 불복해 법정 다툼으로 가기도 했다. C사 노동조합도 선거에서 진 후보 진영에서 소송을 제기해 길고 지리한 법정 다툼을 벌인 바 있다.


노동조합 선거에서 K사와 같이 ‘선관위의 중립성’ 문제가 분쟁으로 번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K사의 선거 규약상 선관위는 대의원대회 선출 3명, 집행부 파견 1명, 각 후보진영 파견 각 1명으로 구성된다. B씨 진영이 제기하는 문제는 대의원대회 선출 선관위원 3명이다.

선관위원이 되면 자기 업무에 공백이 생기고, 여러 가지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는데다 선거 운동마저 할 수 없어 대부분의 조합원이 선관위원이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결국 집행부에서 미리 선정해서 형식적으로 대의원대회 선출이라는 절차를 거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선관위원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는 것이 B씨 진영 선거 사무장 L씨의 주장이다.


실제로 선거 시기가 다가오면 선관위 구성에서부터 치열한 ‘눈치보기’와 ‘신경전’이 벌어진다. 한 산별노조는 지난 12월 내내 1월로 예정된 위원장 선거관리위원장 선출에 난항을 겪었다. “선관위원장이 되면 선거 운동도 할 수 없고, 온갖 시비에 골치만 아프기 때문”이라는 게 이 노조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산별노조는 선관위원장 선출이 몇 차례나 무산되자 각 지회 위원장들이 모이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선관위원장 선출 때까지 회의장 바깥으로 못나가게 해야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산별노조의 지회인 K사의 위원장 선거 분쟁이 법정 싸움으로까지 번지면서 산별노조가 나서서 중재와 법적 자문을 통해 사태를 원만히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선거중지 가처분 신청을 낼 때까지 산별노조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 산별노조도 올해 1월에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조 관계자는 “산별노조 위원장 선거에 각 사업장 위원장의 영향력이 지대한 상황에서 괜한 개입을 했다가 향후 산별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어느 쪽에든 ‘미운털’이 박혀 좋을 게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12월 중에 끝날 예정이었던 K사의 선거는 해를 넘겼고 이번 달에 새 집행부를 구성해 한해 사업을 준비해야 하는 노조의 일정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의 몫이 됐다.

 

‘카더라’ 통신의 전성시대

S사 노동조합의 임원 후보 등록기간이던 지난 12월, 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에 때 아닌 ‘광어회 논란’이 붙었다. 논쟁은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 조합원 20여명을 모아 고급 횟집에서 ‘광어회 잔치’를 벌이고 사실상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는 글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

이 글에 하루에도 50건이 넘는 꼬리말이 달리면서 “누구누구는 광어회가 아니라 봉투를 돌렸다더라”, “광어회가 몇 십만원짜리라더라”, “광어회 못 먹어서 억울하면 게시판에서 ‘딴지’ 걸지 말고 직접 사 달라고 해라” 등의 즉각적 반응으로 시작한 논쟁은 결국 실명 거론과 재반론으로 이어졌고, 선관위는 게시판 폐쇄를 결정했다.

 

임원 선거 때 뿐만이 아니다. 이 회사의 대의원 선거 기간이 되면 공장 주변 술집이 조용해진다. 각 후보 진영이 이른바 ‘표 작업’을 하기 위해서 회사 근처 술집을 피해 외곽의 조용한 술집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라는 게 한 현장 활동가의 귀띔이다. 이런 현장이 타 후보 진영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즉시 상호비방과 유언비어가 나돌고 결국은 ‘카더라’통신으로 현장은 난장판이 된다.


이 회사의 조합원 김경석(38·가명)씨는 이런 일이 왜 벌어지냐는 질문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바야흐로 선거철 아닙니까?” 김씨는 지금은 드문 일이지만, 예전에 자신이 속한 향우회에서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 출마자로부터 돈을 받아 ‘고기 잔치’를 벌인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몇몇 대규모 연맹의 선거에서는 위원장에 당선되기 위해서 억대의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노동조합의 선거에도 ‘돈’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사업장이 전국으로 흩어져 있는 노조나 유권자가 전국에 분포해 있는 연맹 단위의 경우 후보자의 유세를 위한 교통비, 선거홍보물 제작비, 기타 선거운동본부 운영비 등이 만만치 않다. 일부이긴 하지만 현금 봉투가 오가는 일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게 선거 관계자들의 고백이다.


전국사업장인 N사의 노동조합 위원장은 “역대 위원장 출마자 중에서 내가 가장 적은 예산을 썼는데도 6천만원이 들었다”고 말했다. 선거 홍보물도 흑백으로 찍고 차량운용과 식대 등 모두 간소화 했지만 짧은 시간에 전국을 다 돌기 위해 사용한 교통비 등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


그는 이것이 ‘삼박자의 조화’라고 말했다. 선거 운동 방식의 비효율성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권력화’되면서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당선만 되면 그만이라는 풍토가 형성된 것, 정책과 상관없이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찍자는 조합원들의 실리주의가 맞물린 결과라는 것이다.


대형 노동조합에서 집행부가 관련된 ‘금전 스캔들’이 심심찮게 터지는 데는 과다한 선거운동 비용 사용도 한몫 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돈을 들인 만큼 그 비용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 것.

 

중병의 원인은 ‘조합의 권력화’


‘선거의 계절’마다 노동조합은 신음한다. 끊임없는 흑색 비방과 부정선거 시비, 조직 간의 이합집산과 조직 동원을 위한 ‘물밑 작업’의 활성화, 정책 대결의 실종과 화려한 구호의 난무 속에서 유일하게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조합원들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선도했고, 여전히 가장 민주적인 조직 중의 하나로 꼽히는 노동조합의 선거 현실과 조합원과의 괴리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해결책에 대해서는 난감해 했다.


한 연맹의 간부는 “아예 전 조합원 직선제로 규약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매번 선거 때만 반짝 등장하는 여론”이라고 했고, 또 다른 간부는 “선거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현장 조합원들의 무관심을 극복하는 사업 기풍을 만들고 일상 활동을 펴는 것이 열쇠”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론도 있었다. “조직동원과 과열은 단지 노동조합의 선거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선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 자체의 속성인데 노동조합만 정정당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불만이었다.


모두에게 이유와 그에 맞는 현실이 있었다. 하지만, “중병에 걸린 노동조합 선거 문화의 정점에 ‘노동조합 지도부의 권력화’가 있다”는 현장 조합원들의 지적은 현재 제기되는 ‘노동운동 위기론’과 무관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