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현재, 잃어버린 과거
잊어버린 현재, 잃어버린 과거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8.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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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태워버린 ‘숭례문’ 우리가 태워버린 ‘역사’
불길이 휩쓸고 간 현실을 바라보다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지난 2월 10일 저녁, 600여년의 시간이 불길 속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보고 자랐던 대한민국의 첫 번째 보물, 국보 1호는 시커먼 그을음과 앙상한 뼈대를 가진 ‘흉물’로 변해버렸다.

혹자는 말했다. “아이들이 외워야 할 날짜가 하나 더 늘겠구먼.”
또 다른 이가 말했다. “숭례문은 없어졌지만 남대문은 잘 지켜졌으면 좋겠삼.”
어떤 사람은 드라마로 채널을 돌렸다. “밥 먹고 사는 데 이상 없어. 왜 이리 난리야.”

새삼스레 국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하기에는 손실이 어마어마하기에 차마 그리 말할 수도 없지만 소홀한 문화재 관리와 그간의 무관심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토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라는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그래서 지켜야만 할 그것을 우리는 얼마나 지켜내고 있는가.


 

벽장 속 ‘유물’

 

어느 집에 가든 앨범을 보관하는 곳에는 먼지가 쌓여있다. 칫솔과 수저처럼 매일 꺼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없으면 불편한 것이지만 우리는 대개 칫솔보다는 내가 살아온 과거가 담긴 앨범을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가 예전에 말이야, 너 만하던 때 장독을 깨뜨리고는 어머니한테 얻어맞고 울면서 찍은 사진이란다”라는 말을 들려줄 때를 기다리며, 또는 아이에게 내 살아온 과거를 들려주며 그것을 거울삼아 나보다 더 잘 자라주기를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

 

일기를 써 온 사람이라면, 이사를 할 때마다 낡은 일기장을 다시 한 번 펼쳐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서랍의 맨 안쪽, 혹은 서재의 구석진 곳에 먼지와 함께 쌓여있지만 이사를 할 때나 정리를 할 때 ‘지금 필요가 없으니’ 과감히 폐지함에 넣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는 힘들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내가 살아가는 일생동안 몇 번 펴 보지 않을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가.

 

열정과 패기가 가득했던 그 때의 과감한 필체와 아직 설익은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일기장.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물이 되고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가치를 가진 삶의 기록. 당신은 지금 그 기록을 갖고 있는가.

                         

당장 오늘을 살아가기 바빴던 한 사람이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간직해 온 앨범과 일기장. 언제 펼쳐봤는지도 모를 그 기록들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예전에 어떻게 생겼었는지, 그리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어가고 있을 즈음 다시 그것을 펼쳐보기 위해 벽장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앨범과 일기장은 보이지 않았다. 3년 전 이사 할 때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지난해 봄 대청소를 하면서 폐지와 함께 버려진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도저히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웠지만 이제 와 그것을 어찌 찾는단 말인가.

 

입맛이 없어 저녁을 거르고 잠을 청한 그 사람은 다음 날 아침 아무 일 없던 듯 출근 시간에 맞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숭례문 지못미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저녁 8시. 대한민국의 수도, 그 한복판에 600여 년의 세월동안 한 자리에 서서 수많은 죽음과 삶, 치열했던 민족의 삶을 기록해 왔던 보물이 잿더미로 변했다. 거기에는 시너 한 통과 라이터 하나, 세상에 분노하던 한 남자, 그리고 2008년 대한민국의 사회가 있었다.

 

숭례문 화재 이후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문화재의 관리 소홀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숭례문의 복원 과정과 상징성 이야기까지 폭넓게 이뤄지고 있는 듯 보인다. 인터넷에서는 검은 리본과 ‘지못미’라는 글로 숭례문 화재를 안타까워하는 네티즌들의 물결이 이어졌다. ‘지못미’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의 줄임말로 쓰이는 인터넷 신조어다. 

 

하지만, 화재를 둘러싼 이 모든 소란들이 마치 ‘잠시 일기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보는’ 것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우려가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그 자리에 있는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를 만들어 오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잊고 그 연결고리를 끊어낸 채 ‘국보 1호’의 가치를 말할 수 없다.

 

한 네티즌은 이번에 화재가 난 후 “서울 시내를 그렇게 많이 지나다니면서도 숭례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랐다”는 탄식을 하며 “문화재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내 주변에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토로했다.

 

또 숭례문 화재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며 “숭례문은 불탔지만 남대문은 잘 지켰으면 좋겠어요”라는 한 학생의 글이 많은 사람들을 탄식하게 했다.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김한종 교수는 “여지껏 되풀이 되어 온 역시 속의 사건들을 되짚으며 교훈을 얻는 것은 중요하다”며 “하지만 교훈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사물이나 현상을 판단하거나 해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개인적인 문제이건 사회적인 문제이건 간에, 자신이 문제라고 느끼는 것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 즉 사회적으로 실천하려는 의지를 지닌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역사 교육”이라고 말한다. 

 

매일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가운데 배워야 할 것들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고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또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벽장 속에, 언제 잊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유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숭례문을 불태워 버린 것은 단 한 사람이지만 우리가 정말 지켜주지 못했던 것은 남대문이 가졌던 외적인 모습 뿐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 이어온, 그리고 분명 존재했던 유물의 ‘가치’가 아닐까.

 

역사는 외롭다

 

최근 ‘이산’과 ‘왕과 나’라는 역사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얻고 있다. 사람들은 정조 이산의 카리스마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연산군의 폭정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다.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매 회 진행되는 사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다. 그러면서 또 한편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왜곡’이다. 제대로 된 역사를 공부해 보지 못한 아이들은 역사를 ‘스캔들’과 ‘사건’으로 인식하고, 또 그것이 진실이라 믿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픽션’임을 밝힌 드라마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역사를 ‘흥미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 쯤으로 치부하게 하고 또한 역사를 ‘흥미’로 접근한다는 데 있다. 

 

김한종 교수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역사’, ‘알아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으며, 적극적으로 가르치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며 “TV나 역사소설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더라도, 그 역사적 의미를 살려서 전달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내용을 꾸밀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잃어버린 일기장보다 바쁜 일상 속에 살다 문득 잊어버린 내 어린 시절의 모습과 추억들이 서럽듯, 우리의 역사 역시 ‘스캔들’로 쏟아지는 대중적 관심과는 달리 우리가 지나온, 알아야 할 역사 또한 외롭게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숭례문은 아름다웠다

 

두 차례의 외란과 한국전쟁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숭례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숭례문(崇禮門)은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1394년에 창건되었다. 우리가 보아 오던 건물은 1447년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 이렇듯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한국 성문이기 때문에 지켜왔던 것일까? 물론 잘 보존되어 온 오래된 건물로서의 가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지켜 온 사람들은 ‘오래된 건물’이라는 가치만을 후손에게 전달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김한종 교수는 “오래된, 조선시대 성곽의 모습과 건축술을 잘 알 수 있다는 사실도 국보로 지정하게 된 중요한 이유지만 숭례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고민이 과연 있었는지는 의문”이라며 “조선시대의 건축술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조상이 훌륭한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우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달랑 남은 성문 하나를 통해 일제가 얼마나 우리의 문화유산을 파괴했는지 알게 하려는 목적인지는 별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한 “모든 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는 반박을 할 수 있겠지만, 여태껏 우리가 해 온 생각들과 교육의 방식은 문화재를 ‘보존의 대상’으로 생각했지,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이다”라는 말을 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서있는 현재가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축적해 준 과거의 경험과 추억의 산물이듯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 치열했던 ‘현재’들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산물이다. 

 

다시 잊어버린 벽장 속 일기장을 들춰보자. 왜 우리는 ‘일기’를 쓰고 ‘역사’를 공부하고, 과거를 되돌아보는가. 무심코 잊어버리고 사는 수많은 일상 속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잊고 살아온 과거의 삶과 죽음들이, ‘시간’의 축적, 먼지 쌓인 유물이, 그리고 과거의 산물이 현재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중이다.

 

함께 대화를 할 것인지, 그리고 또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는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는 온전히 2008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숭례문 화재를 거론하며 ‘국보 2호’도 아닌 ‘1호’가 불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에게 ‘국보 2호가 뭐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지금의 탑골공원이 있는 자리에 원각사라는 절이 있었다.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워져 내려오다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절이 없어지고 석탑이 하나 남았으니, 지금의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이다.

 

유리막으로 가려져 있는 탑, 숭례문 화재 후 보름이 지나 찾은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니, 새삼 낯설다. 몇 번씩 공원을 들락날락 하면서도 한번 눈에 띈 적이 없었던 듯하다.

핸드폰으로 석탑을 촬영을 하고 있던 한 대학생은 “저도 이야기를 나눠보니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기에 블로그에 ‘답사기’라도 올려볼까 해서 찾아왔다”고 전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탑을 보고 갔다.
석탑을 둘러보고 나오며 노점상을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에게 ‘국보 2호’를 묻자 “그것도 여유 있는 사람이들이나 하고 사는 생각이지 당장 내 먹고 살기도 힘든데 국보가 다 뭐냐”며 “그 앞에서 5년을 장사하면서도 몰랐어. 있으면 있는가보다 하는 거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국보 1호의 소실’로 ‘국보 2호’를 찾고, 또 그 앞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숭례문이 불탔다. 그리고 아직 지켜지고 있는 것들이 있으며, 위험에 처해 있는 것들이 있다. 이 기사 후에 다시 3호를, 4호를 찾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역사가 가진 소중함’을 함께 찾아볼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