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의 위기, 3번의 극복, 그리고…
3번의 위기, 3번의 극복, 그리고…
  • 함지윤 기자
  • 승인 2008.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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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_ 2008 기아자동차 보고서
③ 64년 부침(浮沈)의 역사

ⓒ 기아자동차(주)

 

1960년   부도 → 기아마스터 T-2000으로 반전
1980년   8·20조치 → 원가절감과 봉고 신화로 역전
1997년   법정 관리 → ‘카니발’ 형제들로 수렁 탈출

 

 

1944년 전신인 경성정공(주)이 설립된 이래 어느새 기아자동차(주)의 나이도 64살이 된다. 한국전쟁을 겪고 군부시대와 IMF 외환위기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들어진 기아차의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와 획을 같이 한다. 그래서 기아차가 걸어온 64년의 세월 또한 위기와 극복의 역사이다.

기아차의 전신인 경성정공(주)은 수공업 형태로 자전거 부품을 제작했다. 그러다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한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자전거 자체 조립 및 자전거부품 국산화를 성공시킨다. 이 과정에서 1952년 ‘기아산업(주)’으로 사명을 바꿨다. ‘기아(起亞)’는 아시아에서 일어나 세계로 진출한다는 뜻이라는 게 기아차측의 설명이다.

기아로 사명을 바꾼 그해 최초의 국산자전거 ‘3000리호’가 생산됐다. 기아는 1957년엔 서독에서 현대식 생산시설을 도입해 완전 기계공업의 형태를 갖춘 시흥공장을 준공했다. 자전거, 오토바이, 3륜차를 생산한 시흥공장은 기아가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마련한 곳이다.

 

 

1960  기아에 찾아온 첫 번째 부도사태


자전거 생산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시흥공장을 건설했지만 이는 경영에 큰 부담이 됐다. 1955년 시흥공장을 착공하면서 과도한 투자가 계속돼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59년 9월 우리나라를 강타한 사라호 태풍으로 부산공장은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피해를 입어 경영악화를 가중시켰다. 

 

당시 대한민국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시민혁명이 발발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경제활동은 마비됐다. 여기에 4·19 이후 실시된 총선에 김철호 사장이 출마해 낙선하는 등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결국 기아는 1960년에 첫 부도사태를 맞게 된다. 뒷날 대부분 복직되었지만 당시 부도사태로 총 450여 명의 종업원 중 200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아는 2륜 오토바이와 3륜 자동차 생산을 위한 시설확충에 총력에 기울인다. 결국 1961년 국내 최초의 2륜 오토바이 ‘기아혼다 C-100’을 생산하고, 1962년엔 3륜차 ‘K-360’을 생산했고, 이것은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원년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3륜차 생산을 계기로 1962년 기아 시흥공장은 국내 최초로 자동차제조공장 허가를 취득했다. 그러나 3륜차 사업이 곧바로 성과를 안겨주지는 않았다. 따라서 주력 사업을 3륜차와 자전거로 양립시키는 전략을 통해 6년 만에 적자의 늪에서 탈출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판으로 하고, 제1차 3륜차 사업의 부진을 거울삼아 1967년 유명한 ‘기아마스터 T-2000’을 내놓는다. 기아마스터 T-2000은 자동차기업으로 내놓은 첫 히트상품으로 출시 첫해에 1200대를 판매했다. 뒤이어 나온 T-600도 호평을 받아 기아의 성장에 교두보 역할을 했다.

 

1973  23만평 규모의 소하리 공장 건설

 

3륜차 T-2000을 제작하며 기술을 익혀온 기아는 일본 기업들과 추가 기술계약을 체결하고 3륜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지 10년만인 1971년 첫 4륜 트럭인 ‘타이탄 E-2000’과 ‘복사 E-3800’을 생산하게 된다. 1970년대 초기 여건은 제1차 오일쇼크의 충격으로 경제환경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지만, 기아는 경영이 안정궤도에 들어서고 자동차공업 육성시책 대상에도 포함돼 안정된 환경 속에서 4륜 자동차 개발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 두 차종은 소하리공장이 준공되기 전 시흥공장에서 제작된 마지막 산물이었다.

 

기아는 회사의 경영이 호전되자 대규모의 자동차공장 건설을 위해 1968년부터 3년 동안 단계적으로 소하리 일대 22만9078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1970년부터 3년 동안 공사한 끝에 1973년 6월 소하리공장을 준공시켰다. 무려 3년 동안 100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였기에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가 부도가 나고, 기아가 공장 짓다가 망하게 됐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소하리공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일관공정시스템을 갖춘 종합자동차공장이었다. 준공 당시엔 연산 2만5천대 규모였던 공장은 해를 거듭하면서 계속 확장돼 1980년대에는 연산 30만대 규모로 대형화됐다. <한국자동차70년사>는 소하리공장 준공에 대해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을 선도하고 자동차 완전 국산화를 이룩하는 터전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1970~  국민차 생산을 위한 자동차 3사 대결

 

박정희 정부의 자동차 국산화 계획

자동차공업 육성 기본계획은 국산화 3단계 계획의 일환이다.

 

①제1단계(1967~1969)는 3개 조립공장의 건설을 완료해 자동차 생산기반을 구축하고, ②제2단계(1970~1972)는 부품공장을 건설해 부품의 양산화를 꾀하는 한편 엔진 주물공장·차체 프레스공장 등을 건설해 승용차의 완전 국산화체제를 확립하며, ③제3단계(1973~1975)는 국산 표준차를 제작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민차 생산계획은 ①소형 승용차 국산화 대상 부품 및 공장 지정(1970.4.22) ②군소조립공장 폐쇄(1972.1.20) ③자동차공업 육성계획(1973.1.18) ④자동차공업 육성에 관한 대통령 지시(1973.9.6) ⑤자동차공업 장기진흥계획(1974.5.7) 등의 조치로 구체화됐다.

 

이런 일련의 시책들은 궁극적으로 자동차 국산화율을 1974년도에 60% 이상, 1975년도에 75% 이상, 1976년도에 90%까지 끌어올린다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기아가 대약진을 하던 1970년대 전반기는 유신체제가 성립되고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운 긴장된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제4차 중동전쟁 발발로 국내 유류가격이 큰 폭으로 인상돼 경제에도 극심한 타격을 줬다. 이와 같은 1970년대 전반기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자동차업계에 일대 방향전환을 불가피하게 해 결국 유류 절약형의 소형 승용차인 국민차 생산을 촉진하는 요소가 됐다.

 

당시 정부는 1969년 12월 자동차공업 육성 기본계획을 보완 발표하고, 이어 1970년 2월 국민차 생산계획을 발표했다. 이 같은 조치는 한마디로 자동차 국산화계획이었다. 이런 계획에 따라 자동차 조립생산 메이커를 3원화체제(기아, 현대, GMK)로 육성하고자 했다.

 

기아는 브리사를, 포드와 손을 잡은 현대자동차는 포니를, GM과 합작한 GMK(뒤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는 제미니를 앞세워 소형 승용차 생산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타사보다 축적된 기술이 앞섰던 기아는 1974년 브리사를 생산하면서 엔진·추진축·클러치 등을 국산화해 63.01%의 국산화율을 달성했고, 1976년에는 89.47%까지 국산화율을 높여 국민차 생산에서 선두주자의 영광을 차지했다.

 

기아는 브리사가 국민차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소비자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면서 1975년 1월 부품가격을 평균 30% 인하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는 소비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자동차업계에는 경쟁열풍을 몰고 왔다. 

 

1976  그룹 경영체제 형성과 아시아자동차 인수

 

승용차 생산을 계기로 기아는 2륜차·자전거·강관사업을 분리한다는 원칙 아래 합작 투자와 자회사 설립을 적극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기아는 1976년 아시아자동차공업(주)을 인수했다. 

 

1970년대 전반기만 해도 아시아자동차는 기아의 경쟁자였다. 따라서 기아의 아시아자동차 인수는 자동차 업계 빅뉴스 중 하나였고 자동차공업계의 새로운 판도가 형성됐다. 아시아자동차는 기아그룹의 일원이 되면서 군수차량 생산전문업체로 지정받아 방산업체로서의 새 진로를 개척하게 됐다. 1977년 6월부터 경장갑차를 생산하기 시작해, 1978년 8월부터 군용 표준차량을 제작했다. 기아기공의 설립과 아시아자동차공업의 인수를 계기로 1977년 그룹 경영체제가 확립된 기아는 연속 흑자를 내면서 재무구조가 안정화 된다. 

 

1980  8·20조치와 2·28조치로 인한 2번째 위기

 

1970년대 후반기는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이 과열경쟁을 하던 시기로 기술개발, 설비증설 등에 각 자동차업체들의 투자가 집중됐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 동안 기아는 456억7000만원, 현대자동차는 726억5100만원, 새한자동차는 318억5000만원을 각각 투자했다(<자동차조합 20년사>).

 

8·20 조치와 2·28 조치

1980년 8월 20일
‘중화학분야 투자조정 조치’

경기부양에 파급효과가 큰 자동차산업을 전면 재편하는 것으로, ①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를 통합, 현대자동차에서 경영을 맡아 승용차를 전문 생산하고 ②기아는 승용차 생산을 포기하고 1톤 이상 5톤 이내의 트럭과 버스를 전문 생산하며 ③5톤 이상 트럭과 버스는 자유경쟁의 원칙에 따라 현대-새한 통합사와 기아가 계속 생산토록 한다는 조치


1981년 2월 28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①승용차 생산은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로 2원화해 경쟁체제를 유지하고 ②기아와 동아자동차공업을 통합해 차종별 전문 생산체제를 강화하며 ③2륜차 생산은 대림공업과 효성기계공업으로 2원화한다는 것

 

여기에 1979년 6월 OPEC의 원유가격 59% 인상으로 빚어진 제2차 오일쇼크는 세계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더구나 같은 해 10월 국내에선 10·26사태까지 발생해 국내경제는 급속도로 위축돼 심각한 경제침체를 가져왔다. 1980년 1월엔 환율과 금리 인상에 이어 유가가 57%나 뛰어올랐고, 5월에는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광주 민주화항쟁이 발생했으며, 8월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9월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렇듯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연쇄적으로 빚어지는 경제난조에 산업계는 미처 대응할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자동차업계는 1970년대 후반기의 과열투자로 인한 시설확장에 수요부진이 겹쳐 엄청난 재고가 쌓이고 가동중단 사태까지 맞게 됐다. 이런 경기침체 속에 1980년 8월에 국보위가 경기부양 대책으로 내놓은 ‘중화학 분야 투자조정 조치’는 기아의 진로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벽이었다.

 

1980년 8월 20일 국보위가 내놓은 ‘8·20조치’에 따른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의 통합협상이 진전이 없자, 정부는 1981년 2월 28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를 내놓았다. 이 두 조치에 따라 기아는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고 2륜차 사업은 대림산업에 넘겨주고, 1톤 이상 5톤 이내의 트럭과 버스를 전문 생산하게 됐다.

 

더구나 승용차를 독점생산하게 된 현대자동차에서 픽업은 승용차 라인에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1톤 이하의 기존 포니픽업을 계속 생산하겠다고 주장해 결국 상용차인 픽업은 현대와 기아가 분할 생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외부적 경영환경의 변화로 기아는 당기손실금 237억 원 적자를 보는 등 걷잡을 수 없는 또 한번의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1981  봉고, 신화로 흑자 전환하고 위기 극복

 

기아는 1981년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7월과 8월에 와이드로 타이탄 1.4톤(E-2500 저상)과 봉고 코치 12인승(E-2200)을 생산한다. 또 위기돌파 계기를 마련하고자 자본과 경영을 분리하고 전문경영인체제를 도입하고 김선홍 사장이 취임하게 된다.

 

기아를 흑자기업으로 전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봉고 확판 운동이 만들어낸 봉고신화다. 기아는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전사원의 판매력을 봉고 코치(E-2200) 한 차종에만 집중시켰다. 작업복 명찰 위에 봉고의 상표를 붙이고 아침인사도 ‘봉고를 팝시다’로 대신했다. 또 그동안 팔린 봉고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조사해 그것을 모두 사진 찍어 앨범으로 만들고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소비자들을 상대로 봉고의 다양한 용도를 설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봉고코치 신문광고(1983. 11~1984. 2)                  ⓒ 기아자동차(주)

 

2·28조치로 매출액 구성에서 주종을 이뤘던 승용차는 생산을 중단하게 되고, 흑자경영에 일조했던 오토바이도 대림으로 넘어가면서 1980년대 초기 기아는 위기에서 구해줄 마땅한 상품이 없었다. 이에 기아는 기아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개발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는 등 기술 드라이브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기술력의 급신장과 국민 정서에 맞고 소비자 취향에 영합할 수 있는 다양한 신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봉고 신화를 만들어낸 봉고 코치만 해도 12인승을 비롯해 9인승, 3밴, 6밴, 앰뷸런스, 봉고 타운 등 제품군이 다양했다. 이렇게 배양된 기술력은 1986년 봉고의 후속 모델인 베스타를 개발하고, 1987년 프라이드를 생산하게 된 바탕이 됐다. 

 

봉고 확판 운동으로 1982년부터 1984년까지 3년 동안 자동차 총 판매대수는 내수 17만5662대였는데, 이중 봉고류가 전체 65.95%에 해당하는 11만7416대였다. 연평균 약 4만대 공급 기록을 세운 것인데, 언론은 이를 ‘봉고의 신화’라고 불렀다. 이를 바탕으로 기아는 1년 만에 2년 동안의 누적적자 504억 원을 39억 원의 흑자로 역전시키며 위기를 타파했다. 그리고 다음해는 291억 원의 순이익을 올려 국내 100대 상장기업 중 순이익 1위의 기업으로 부상했다. 1980년과 1981년에 각각 237억 원과 266억 원 적자였던 당기순수익은 1982년부터 흑자로 돌아서 1985년까지 3년 동안의 누계흑자는 564억 원에 이르렀다. 

 

ⓒ 기아자동차(주)

 

1987  승용차 생산 재개와 아산만기지 건설의 첫 삽

 

정부는 1986년부터 자동차 수입을 개방하고, 1987년부터 2·28조치로 묶였던 자동차의 차종 생산제한을 자유화시켰다. 기아는 이미 1982년부터 차종자유화에 대비해 승용차 생산계획을 세우고 기아·마쓰다·포드 등 3국3사가 참여하는 Y-Car프로젝트인 NB-Ⅲ 개발계획, 즉 프라이드 개발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2·28조치가 풀린 1987년 기아는 승용차 전문공장인 프라이드 공장을 준공시키고 본격적인 프라이드 양산에 돌입했다. 

 

1987년은 기아가 승용차 생산 재개와 더불어 아산만공장(현 화성공장) 기공식을 갖고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해이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일대 약 100만평 규모의 아산만기지는 1990년까지 1단계, 1992년까지 2단계, 1995년까지 3단계로 공사를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기아는 60만대 규모의 아산만 공장 건설을 통해 소하리공장의 40만대와 더불어 총 100만대 생산체계를 갖춘다는 것이 목표였다.

 

1980년대 초반의 위기를 극복해낸 기아는 1987년엔 매출액 1조 원을 돌파하고, 1988년 1월엔 국내 자동차 메이커로서는 최초로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하는 등 승승장구 성장했다. 

 

ⓒ 기아자동차(주)

 

1993  독자개발 승용차 생산과 삼성의 주식 매입 파문

 

기아는 1990년 제2기 전문경영인체제를 출범하면서 상호를 기아산업에서 ‘기아자동차(주)’로 변경했다. 이는 “자동차전문 그룹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고 21세기 세계 정상급 자동차그룹에 강력히 도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줄 아산만공장이 1990년 11월 준공해 그해 ‘프라이드 베타’를 출시했다.

 

기아는 1992년 첫 고유모델이자 국내 최초로 샤시를 독자개발해 완전 국산화를 이룬 1500cc급 승용차 ‘세피아’를 발표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두 번째 고유모델인 스포티지를 출시했다.

 

이렇게 기아가 아산만시대와 완전 국산화한 독자모델 출시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 당시, 삼성그룹의 기아 주식 매집 파문이 일어났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1993년 6월까지 삼성생명이 보유한 기아주식 지분율은 5.8%에 불과하였으나 이후 3개월 동안 삼성생명, 안국화재, 삼성증권 등이 집중적으로 기아주식을 매입해 지분율이 8.0%로 높아지면서 최대주주로 부상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삼성그룹의 단기간 내 대규모적인 주식 매입은 승용차사업 진출을 노리는 삼성의 기존업체에 대한 견제와 경영권 위협으로, 또한 전문경영인체제가 정착돼 대주주가 따로 없는 주식분산 우량기업에 대한 합병기도로 받아들여져 당시 경제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삼성그룹의 승용차사업 진출에 부정적 입장을 시사해오던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1994년 12월 삼성측이 제출한 승용차 기술도입신고서를 전격 수리함으로써 기존 자동차업계는 물론, 경제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기아사태 일지

▲ 1997년 7월 15일  기아그룹 15개 계열사 부도유예협약 적용
1997년 7월 16일  기아 경영혁신기획단 발족, 자구계획 발표
1997년 7월 22일  채권금융기관장, 김선홍 회장 사표제출 전제로 1600억원 이내 지원 합의
1997년 8월 4일  채권금융기관 1차 대표자회의, 김선홍 회장 사표제출 전제로 자금지원 방침 결정,

                         김선홍 회장은 퇴진 거부
1997년 8월 6일  기아차 협력사 등 1만명 궐기대회
1997년 8월 22일  삼성그룹의 기아 인수추진 보고서 언론보도
1997년 9월 22~26일  기아차 등 11개 계열사 화의신청, 기아특수강 등 3개사 법정관리신청
1997년 9월 26일  채권금융기관장 회의에서 기아 법정관리가 유리하다고 결론
1997년 9월 29일  부도유예기간 만료. 채권금융단회의에서 10월 6일까지 입장정리토록 최후 통첩
1997년 10월 6일  기아그룹, 화의고수 입장 채권단에 전달
1997년 10월 21일  관계 장관회의에서 법정관리 신청 방침 확정
1997년 10월 23일  정부 ‘법정관리를 통한 기아사태 정상화방안’ 발표 
                            법정관리 개시 즉시 제3자에 매각, 경영정상화 이뤄질 때까지 공기업체제 유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
1998년 12월 1일  현대자동차와 주식인수 계약체결

 

1997  또 한 번의 부도사태와 현대차 인수

 

1980년 초기에 발생한 두 번째 위기도 성공적으로 극복한 기아는 1990년대에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다. 1991년 6월 중순부터 한 달간 진행된 노조의 파업과 부품업체 노사갈등으로 인한 부품공급난으로 생산 및 판매가 70% 격감했다. 여기에 자동차판매 부진으로 재고는 급격하게 늘어나고 1992년 5월 27일부터 조업을 중단하게 된다. 독자모델인 ‘세피아’의 대미수출 또한 미국시장에서의 판매전망이 불투명해 연기하게 된다. 

 

1993년 하반기부터 계속된 기아의 부진은 다음해에는 더욱 심해졌다. 세피아나 스포티지처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품질의 차를 갖고도 내수시장 점유율이 대우차에게도 밀렸다. 당시 기아의 부진은 수출물량이 늘면서 내수공급의 한계가 큰 원인이었고, 프라이드 생산을 아시아자동차로 옮기면서 생산차질을 빚은 것이 판매부진을 심화시켰다. 특히 봉고 신화를 만든 기아의 와이드 봉고와 베스타는 현대차의 포터와 그레이스 판매에 크게 뒤지면서 상용차 정상자리에서도 밀려나게 됐다. 

 

기아는 판매부진을 벗어나기 위해 1994년 대규모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차종별 책임관리제를 도입해 한 사람의 임원 책임 아래 차종별로 개발·생산·품질 등 전과정을 종합적으로 책임관리토록 했다. 대대적인 조직개편 이후 판매력이 강화돼 잠시 내수 2위 자리를 되찾기도 했지만 경영사정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이런 대외적 환경의 변화와 내적구조에 대한 의구심은 회사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졌고, 현장의 근무기강은 과거와 달리 떨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증권가에선 밑도 끝도 없는 ‘기아 합병설’ 루머가 나돌았다. 루머의 핵심은 삼성과 관련된 것이었고, 여기에 현대그룹과 LG그룹도 거론됐다. 소문은 자동차 가격인하를 통한 판매촉진 및 해외에서의 긍정적 평가 등에도 불구하고 현실로 나타나 1997년 7월 15일 부도방지협약 대상기업으로 지정되고, 이후 화의신청을 거쳐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98년 12월 1일 현대자동차에 인수된다.

 

당시 자산기준 재계순위 8위인 기아그룹이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은 △경기를 예측하지 못한 무리한 투자 △주력인 자동차사업의 부진 △끊임없는 자금악화 및 인수·합병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였다.

 

1999  현대에 새롭게 둥지 틀고 ‘3카’로 재도약

 

기아차는 미니밴 카니발의 인기에 힘입어 1999년 4월 중순부터 시판할 미니밴들의 이름을 ‘카~’시리즈로 정했다. 기아의 미니밴 ‘카~’ 3형제는 ‘카니발’과 ‘카스타’ ‘카렌스’다. 다목적 차량(RV)인 카니발은 기아가 법정관리 절차를 밟으며 입찰을 앞두고 있는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미니밴 판매에서 부동의 선두를 차지했다. 수렁에 빠진 회사의 지원 없이 오로지 차의 성능과 컨셉트만으로 일구어낸 성과로 97년 부도 이후 경영정사화의 견인차 역할을 한 효자상품으로 평가받는다. 카니발의 인기는 승용차에 비해 각종 세제 혜택을 받는데다, 디젤연료비도 중형 가솔린 차량의 절반 이하에 불과해 IMF 시기에 적합한 차량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카니발의 뒤를 잇는 카렌스와 카스타도 불티나게 팔리면서 기아는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하고 내수 2위 자리를 탈환하게 됐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2월 27일에 법정관리에서도 졸업했다. 당시 기아차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기아자동차를 빛낸 차’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카렌스와 카니발이 1, 2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