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창적으로 성장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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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여와혁신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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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우리는 하나?
독창적으로! 독창적으로!

▲ 김종휘
하자센터 기획부장

겨울 방학입니다. 제가 있는 대안학교는 일반 학교들보다 조금 일찍 방학을 합니다. 저는 이번 방학식 때에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고 생각 중이랍니다. 개그맨 강유미 씨가 일대 유행을 시킨 멋진 말이지요. “독창적으로 살아, 이 자식아, 팍!” 저는 요즘 아이들에게 이 말만큼 꼭 필요한 인생 지침이 또 있을까 싶어집니다.


독창적으로 살아라! 독창적으로 놀아라! 독창적으로 연애해! 독창적으로 공부해! 독창적으로 좌절해! 독창적으로 친구해! 독창적으로…! 독창적으로…!

돌아보면 우리 어른들이 해주는 말이란 온통 ‘남들처럼~’ 하라는 소리뿐이지요. 공부가 그렇고 대학가는 일이 그렇고 취업하는 게 그렇고 결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마다 각자 독창적으로 태어난 생명인데 인생을 독창적으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남들처럼 살다가 남들처럼 죽어 가는 형편이지요.

 

‘단일성의 허구’로 일관한 교육 실태
 
그러고 보니 우리 어른들이 세상 살아온 지혜라는 것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이 있었지요. 선거 때면 특정 지역의 어른들 사이에서 곧잘 쓰였던 이 말에는 서로 돕고 살자는 좋은 취지도 있지만, 그보다는 너와 나는 한편이라는 결속력을 확인하는 뜻이 더 강하게 들어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같지만 저 지역의 사람들은 남이라는 배타성이지요. 편을 가르고 이 편에 속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상한 눈치 보기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말도 있군요. 군사문화가 나라를 판치던 과거에 군대의 몹쓸 사조직이던 하나회에서 비롯된 구호라고 알고 있습니다. ‘태양도 하나 우리도 하나’ 그렇게 불렸던 슬로건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듣기에 따라선 단합심을 기르는 좋은 말 같지만, 그 쓰임새란 ‘하나된 우리’에 속하지 않는 너희들은 온통 탈락자이며 경쟁자이고 적이라는 배타성에 있었지요.


이 모든 감성과 논리는 서로 다른 개인들에게 ‘단일성의 허구’를 주입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일하다’는 거짓 신화이지요. 세 사람이 있는데 어느 날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타나선 나머지 한 사람에게 ‘우리는 하나다’라고 선언하고 노려보면, 나머지 한 사람은 ‘나도 우리 할게’라고 가담하기 쉽지요. 이유는 두려워서입니다.

그럼 세 사람이 뭉쳐 다니면서 누군가에 다가가서 또 ‘우리는 하나’를 선언하고 선택을 종용하는 게임이 계속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단일성의 허구’는 진짜인양 행세를 합니다.


이 단일성이 하는 일이란 창조적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직 배타성의 폭력뿐이지요. ‘하나된 우리’에 끼지 않으면 ‘따’를 당하게 되니 그것이 무서워서 눈치를 보며 가담하게 됩니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남의 뜻을 따라간다는 것이고 거기에 순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전부 이렇다고 할 수 있지요. 눈치를 보게 하고 순응하게 만들어서 남들처럼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별성, 소수자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이러하니 ‘독창적으로 살아, 이 자식아, 팍!’ 하는 말 한 마디가 갖는 깨달음의 울림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대안교육이란 실상은 기존의 교육이 단일성의 허구와 배타성의 폭력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눈치 보는 기술과 순응하는 법을 받아들이게 했다고 비판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라면 아이들 저마다 독창적으로 갖고 태어난 창조적 잠재력이 발휘되기는커녕 도리어 죽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독창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를 바란다면, 우리 어른들은 아이에게 개별성과 소수자라는 바탕을 주어야 합니다. 거대한 이념, 추상적인 원리, 단일성의 허구는 도움이 안 됩니다. 그보다는 인간 저마다의 작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실체로서 행동하고 느끼고 사고하게 길을 열어주어야 하지요.

거기에서 아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소수자라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소수자란 사회적 약자를 뜻하는 말과는 다르지요. 너와 다른 나, 나와 다른 너의 개별성, 그 소수자됨의 의미, 즉 창조적 에너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사회적 약자가 되어 있는 소수자들, 한국 사회의 경우에는 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혼혈, 소년소녀가장 등등의 소수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더욱 깊게 사고하게 됩니다. 단일해지고 배타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소수자로서 너와 내가 함께 평화롭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게 됩니다.

교육을 생각할 때 바로 그러한 감수성과 사고력이 바탕이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강유미씨 개그를 통하지 않더라도 각자 독창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게 되겠지요.


‘남들처럼’은 이제 그만

곧 방학식을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강유미씨의 개그 한 마디를 던질 생각입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유 때문에 남들처럼 살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불안해하면서 ‘남들처럼~’의 폭력적 유혹 앞에 기가 꺾일지도 모를 아이들에게 계속 너의 길을 가라는 뜻을 담아서 말입니다.


부모님들은 방학이 되면 아이들 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되겠지요. 그때마다 어떤 말을 하게 될지 미리 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 넌 공부 안 하냐! (남들처럼)’, ‘야, 너 그래서 뭐가 되겠니! (남들처럼)’, ‘야, 니 성적으로 대학 가겠냐! (남들처럼)’ 혹시 이런 말들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런 말들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아마도 평생을 ‘남들처럼~’의 주문을 외우면서 눈치 보기와 순응하기의 삶을 살아갈지 모릅니다.


우리 어른들 중에 그런 삶이 무난하다거나 또는 행복한 것이라고 억지를 피우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너무나 달라져 있으니까요. 교실에서 계속 혼자 딴 짓 하는 아이, 해오라는 숙제를 남들과 다르게 늘 엉뚱하게 해오는 아이, 한 우물을 파지 않고 산만하게 이것저것 다 하려는 아이를 골치 아프게 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교육이 이 세상을 구원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아이들은 단일성의 허구와 배타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것 때문에 망해 가는 사회에서, 그래서 창조적인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을 치는 나라에서, 독창적으로 갖고 태어난 자신의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독창적으로! 독창적으로! 조금씩 힘겹게 자신의 길을 여는 아이들이니까요. 그런 아이들은 이제는 부모도 선생도 우리 모두 독창적으로 살아가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신의 전령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