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안전‧보건 30년 전과 “달라진 것 없다”
한국 노동안전‧보건 30년 전과 “달라진 것 없다”
  • 김민경 기자
  • 승인 2018.07.18 08:17
  • 수정 2018.07.18 0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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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혜’ 넘어 ‘정당한 권리로’…산재 원인규명으로 대안 만들 때
문송면‧원진레이온 노동자 산재 사망 30주기를 맞아 ‘산업재해 피해자 증언대회 및 노동안전보건과제 대토론회가 17일 오후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다.  ⓒ 김민경 기자 mkkim@laborplus.co.kr
문송면‧원진레이온 노동자 산재 사망 30주기를 맞아 ‘산업재해 피해자 증언대회 및 노동안전보건과제 대토론회가 17일 오후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렸다. ⓒ 김민경 기자 mkkim@laborplus.co.kr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15세 소년 문송면을 죽음으로 내몬 수은 중독은 2015년 남영전구 광주공장에서 철거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에게도 여전히 목숨을 위협하는 현존하는 위험이었다. 매년 2,4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한국사회의 산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 산재 사망만인률, OECD 1위

문송면,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투쟁으로 한국사회에서 일터의 안전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대두 된지 30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17일 오후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문송면‧원진레이온 노동자 산재 사망 30주기를 맞아 ‘산업재해 피해자 증언대회 및 노동안전보건과제 대토론회가 열렸다. 증언대회와 대토론으로 나누어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노동자, 노동조합, 건강권단체, 인권단체, 시민단체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증언대회에는 문송면 유가족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재해자를 비롯해 반올림 직업병 재해자와 가족, 산재로 치료 받던 중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집배원의 유가족, 산재사고를 당한 현장실습생 유가족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일하면서 당하는 사고와 겪게 되는 직업병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 개인에게만 돌리는 한국의 제도와 분위기를 지적했다. 이어 더 이상의 비극이 반복돼선 안 된다며, 정부와 기업 등 사회 전체가 산재 발생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01년부터 2016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145만 3,949명이 산재를 당했다. 이 중 산재 사망은 3만 3,902명에 달한다. 매년 2,400여 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는 셈이다. 같은 기간 산업재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262조 5,678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2018년 정부 총예산(429조 원)의 61%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국의 산재사고 사망만인률은 0.68로 OECD 국가 중 여전히 1위다. 이는 일본과 독일의 5배, 영국의 11배에 달하는 수치다. 사망만인율은 1만 명당 사망한 비율로 국가별 또는 산업별 안전보건 수준 등을 비교하기 위해 활용하는 지표다.

산재, 철저한 원인규명에 대안 뒤따라야

백도명 서울대보건대학원 교수는 ‘문송면으로 비롯된 변화들, 그리고 더 변화하여야 할 것들’을 주제로 첫 발제에 나서 “산재보상이 시혜로서의 보상 차원을 넘어 정당한 권리로, 사고의 명확한 원인규명을 통해 실질적인 해결을 위한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교수는 “그동안 한국 사회의 산재사망은 감소한 것 같지만 변한 것이 없다”며 “1988년 이후 산재보상 대상자의 재해율은 꾸준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산재보상 대상자의 사망 만인율과 일반인구 사망률의 변화를 고려했을 때 2000년대 초반까지 산재보상 대상자들의 사망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2000년대 이후 산재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일반 사망률 자체의 감소에 따른 것으로, 결과적으로 산재에서 사망을 줄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회적으로 직업병으로 인정된 비율은 2000년도를 기점으로 확연한 증가했는데, 주로 1997년 IMF 사태 이후 달라진 사회적 환경에 대한 반발로서 노동 강도와 근로조건에 대한 저항이 뇌심혈관질환, 근골격계질환의 신청과 인정이 폭증한 결과로 판단된다”며 “이러한 직업병은 남성, 제조업, 대기업, 조직화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됐고, 대기업 하청 상용직 노동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등은 아직도 산업 안전의 중심에서 소외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의 노동안전‧보건이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건강검진 수준이 아니라 문제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대안이 무엇인지 찾아 현장을 변화시켜야 한다”며 “이를 위해 피해자와 가족들이 문제해결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이 주어져야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한 사업장이 아니라 전체 사업장 체계가, 건강관리가 아니라 건강한 노동으로, 너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며 사업장 안의 권력관계와 사업장 밖의 공급 구조 전반에 대한 개선 지점을 짚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한국사회의 노동안전‧보건 영역이 ‘시혜’로 이해되고 있다는 백 교수의 표현에 공감했다.

최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그동안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위해 현장의 노동자들과 노조, 다양한 시민사회‧전문가 단체가 투쟁해온 과정을 설명하며, 2018년 노동안전보건의 주요 과제로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위험의 외주화 금지 및 원청 책임 강화 ▲과로사, 과로자살 종합 대책 ▲화학물질 알 권리 보장 ▲노동자 정신건강 문제-감정노동, 일터 괴롭힘 ▲청소년‧이주‧여성 노동자의 건강권 ▲산재보험 제도 개혁 등 7가지를 꼽았다.

이 중 최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기업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산재가 발생한 사업장이 안전하게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사업장이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며 “산재 에 대한 책임이 있는 기업이 엄중한 처벌을 받을 때 현장은 변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산재가 발생해도 하청에 대한 원청의 책임이 약하고, 사측이 무혐의 처분을 받는 것이 절대적이다. 2016년 노동자 사망에 대한 기업의 평균 벌금액이 400만원 수준이었다”고 전했다.

17일 오후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산업재해 피해자 증언대회 및 노동안전보건과제 대토론회에서 백도명 서울대보건대학원 교수가 발제하는 모습.  ⓒ 김민경 기자 mkkim@laborplus.co.kr
17일 오후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산업재해 피해자 증언대회 및 노동안전보건과제 대토론회에서 백도명 서울대보건대학원 교수가 발제하는 모습. ⓒ 김민경 기자 mkkim@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