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수화가 석창우 화백의 삶, 그리고 그림
의수화가 석창우 화백의 삶, 그리고 그림
  • 박송호 기자
  • 승인 2018.09.06 18:01
  • 수정 2018.09.07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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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없이 산 30년, 열심히 살았고 잘 살았다. 그리고 행복하고 즐거웠다”

 

 

두 팔이 없는 그에게 네 살짜리 아이가 그림을 그려 달란다. 이미 철이 들어버린, 혹은 사춘기 정도였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정성껏 그렸다. 한 번도 그림을 배워본 적 없지만 매달리는 아이를 위해서, 뭐라도 하는 아빠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꾼 제법 근사한 참새를 그렸다. 의수화가 석창우 화백의 이야기다.

감전사고로 두 팔 잃은 전기기술자, 화가가 되다

석창우 화백은 1984년 전기공사를 하다 전기감전사고로 두 팔을 잃었다. 남편의 참새 그림을 본 ‘사모님’ 곽혜숙 씨는 나락에 빠진 남편이 취미라도 가졌으면 싶었고 재능도 있어 보여 그림 배우기를 권했단다.

아내 곽 씨는 “그림은 소질이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그 소질이 보였다”고 말한다. 그리기의 첫 발이라는 구도 잡는 걸 곧잘 해내는 모습을 보고서였다. 뭘 해내라는 게 아니라, 할 일이 있어야 남편이 살겠다 싶어서 그림을 권했다. 석 화백은 애초에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공고, 공전, 공대 나와서 결혼을 하고 그렇게 살다가 사고를 당했다.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그렸던 참새 그림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후했다. 그러니 다시 이것저것 그려보게 되고 스스로 기분도 좋아지는 걸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배워보자고 결심을 했다. 하지만 몇몇 화실에 물어봤지만 양 팔 없는 사람을 가르쳐본 적도 없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다른 취미를 찾아보라며 거절당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게 사군자였다. 사군자는 다른 그림과 달리 여러 색의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먹 하나만 있으면 될 테니 자신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88년 휴양차 찾은 전주에서 지인의 소개로 여태명 교수를 찾아가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여 교수는 대답이 없었다. 두 팔을 잃은 전기공은 그래도 배우고 싶었다.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만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여전히 여 교수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 그 간절함에 여 교수가 졌다.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막상 시작한 사군자는 만만치 않았다. 일반회화보다 쉬울 것 같아 사군자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서예는 덧칠이 안 되고 한 번 한 획으로 명암이나 농도가 나와야 하는데 쉬 될 리가 없었다. 뜻대로 안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긴 싸움이 시작됐다.

조금씩 다른 분야도 찾았다. 현대미술관에서 이론을 수강하다가 김영자 선생을 통해 누드크로키를 처음 접했다. 모델의 움직임과 표정에서 삼라만상이 표현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서양의 재료지만 자신은 한 획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6년을 매달렸다. 연필, 목탄에 익숙해지자 먹으로 표현하는 것을 시작했다.

비우니 길이 보이더라

미술 하는 사람들이 보통 30년은 해야 뭔가가 된다고들 하는데, 석 화백은 이제 31년째다. 본인도 뭔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단다. 석 화백은 “나는 팔이 없어서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재주도 많은데 중간에 포기하는 게 그림으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본인의 장애가 그림과 생계를 분리시켰고, 그것이 그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예술이 꽃 피운 것은 정부와 상인의 투자와 지원이었다면서 우리 사회도 성공한 예술가, 검증된 작품에 대한 투자만 하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투자와 관심을 부탁했다.

그는 남들의 칭찬이나 인정보다 자신이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남들이 아무리 잘한다하고 칭찬을 하더라도 좋은 뜻에서 한 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처음의 마음을 지키려 노력했다. 자신에게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서 자신 역시 아내 곽 씨의 평가에만 신경 쓴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냉정한 평론가인 아내는, 2014년 소치 패럴림픽 폐막식 때 그림을 보고 전율이 나면서 괜찮다는 소리를 처음으로 했다. “아내의 칭찬에 내가 조금 하나보다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웃는다.

자신이 좋아하면서 즐기지만 지치기도 하는 것이 세상살이일 것이다. 석 화백의 경우도 15분의 퍼포먼스를 하고 나면 목소리가 변하고 일 주일 가량 앓을 정도로 힘이 든다. 소치 동계올림픽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2분 40초였다. 화선지 폭이 8m56cm에 2m10cm인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고 연습을 해봤는데 되지를 않았다. 그 때 아는 목사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혼자서 힘을 쓴다”면서 “같이 하면 편한데”라는 말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해낼 수 있게 됐고 몸도 덜 아프고 힘도 덜 들었다.

“단순한 사람은 있어도 단순한 일은 없어요. 사람들은 일이 잘되면 자기가 잘한 것이고, 안 되면 무언가 탓을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거죠. 맡긴다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다 하려고 해요. 그러면 실패할 확률이 높죠. 잘 하려고 발버둥치고 더 하려고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또 내려놓고 주어진 것에 집중하고 편하게 오늘을 대하면 되는 겁니다.”

 

그는 여전히 인생의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석 화백은 자주 자전거를 그린다. “자전거는 인생과도 같아요. 나의 인생일수도 있고 당신의 인생일수도 있어요. 자전거는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잖아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뒤처지게 되는 것과 같죠.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으면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면서 나아가야죠. 우리의 삶도 열심히 하고 조절하면서 나아가야지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해요.”

석 화백은 그림을 배우는 처음 10여 년간은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그림을 그렸다. 그 세월이 쌓이자 기초가 다져지고, 표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람을 주로 그리는데 처음에는 누드를 그리다가 스포츠 쪽에 관심이 갔다. 나가노 올림픽 때 미셸 콴이라는 아이스댄싱 선수를 보고 그 움직임의 자연미에 빠져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후부터 아이스댄싱을 많이 그렸다.

석 화백이 그리는 모습을 보면 호랑이 한 마리가 걸어가는 느낌이다. 관객들도 전율을 느낀다. 강렬하다. 그런 그에게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 석 화백은 “그림은 아들을 위해서 시작했지만 나를 즐겁게 하고 우리 사모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뭔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다보면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빵점짜리 남편, 아빠, 가장이다. 보통의 가장들은 가족을 위해 아등바등 산다. 그래도 이 땅의 남편은, 가장은, 아빠는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석 화백은 인생이 즐거웠단다. 아프기 전 30년보다 아프고 난 30년이 더 행복했단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했고 그래서 너무 행복했고 하고 싶은 것 다 했단다.

석창우 화백에게 아내 곽혜숙 씨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30살에 두 팔을 잃었다. 그리고 2015년 환갑이 됐으니 30에 다쳐서 30년을 살았다. 열심히 살았고 잘 살았다.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 행복과 즐거움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하느님이 나를 뭔가 도구로 쓰려고 선택했는데 그걸 위해서 아내를 나에게 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자신이 30년을 행복하게 살았으니 뭔가를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성경필사였다. 2015년 1월 30일부터 신약, 구약을 쓰기 시작해서 3년반 정도 걸렸다. 이 세월이 자신에게 준 축복도 있었다. 처음에는 돋보기를 썼는데 이제는 돋보기를 벗고도 잘 보인다. 또 자신의 글씨체를 특허 출원하게 됐다.

요즘은 2년 6개월마다 세대가 바뀐다고 한다. 호흡이 짧아지고 유행도 빠르다. 하지만 정작 젊은이들은 꿈이 없다고 말한다. 석 화백은 젊은 시절 좋으면 하고 싫으면 안 했다. 다치고 나서 아이들 때문에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게 즐거운 일이 된 것이다. 석 화백은 젊은 친구들에게 꿈을 빨리 가지라고 말한다. 제자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 열 가지를 고른 후 다시 2-3가지로 추린 후 자기 기량을 다 발휘하고 노력해 보라고 권한다. 재미가 있으면 노력이 아니라 재미로 하게 된다. 재미로 하면 인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게 된다. 그러니 재미있는 일을 찾으라고 말한다.

석 화백의 꿈은 성경으로 가득찬 건물을 짓는 것이다. 겉은 양각으로 구약을 채우고, 내부는 신약 필사본으로 장식하고 싶단다. 그 공간에서 석 화백의 작품도 전시하고 아이들이 체험하면서 공유하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한다. 석 화백은 또 유럽의 길을 따라 화선지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해보고 싶기도 하다. 유럽의 광장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이렇게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아니, 그것은 개인의 소망이라기보다는 이 부부의 소망이다. 이들은 이렇게 또 재미를 찾아,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새로운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