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금융 노동자가 함께 바꿔나가는 한국사회
사무금융 노동자가 함께 바꿔나가는 한국사회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8.09.06 18:01
  • 수정 2018.09.06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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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화이트칼라 선배들의 역할 잇는다

[커버스토리-노동조합과 사회연대] '우분투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이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의미의 아프리카어 ‘우분투’ 프로젝트가 본격 출범한 지도 어언 6개월이 흘렀다. 올해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며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특별위원회’가 발족했으며, 4월 18일에는 노사정 주요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사회연대기금 조성 선포식을 열기도 했다.

올해부터 전태일 열사 50주기인 2020년까지 3년 동안 총 600억 원의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자는 야심찬 목표는 당초 우려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빠르게 첫 결실을 맺었다.

8월 2일 사무금융노조와 KB증권은 올해 분으로 8억 원의 기금을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아마도 두 번째 결실은 교보증권에서 맺을 것으로 보인다.

김현정 사무금융노조 위원장을 비롯해, 이은순 교보증권지부 지부장, 윤홍순 KB증권지부 사무국장, 박태완 KB손해보험지부 지부장을 만나 ‘우분투’ 프로젝트의 의미와 진행상황에 대해 들었다.

사무금융노조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특별위원회’는 매주 월요일마다 회의를 열고 그동안의 진행상황과 앞으로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를 갖는다.

사진 왼쪽부터 박태완 KB손해보험지부 지부장, 이은순 교보증권지부 지부장, 윤홍순 KB증권지부 사무국장
사진 왼쪽부터 박태완 KB손해보험지부 지부장, 이은순 교보증권지부 지부장, 윤홍순 KB증권지부 사무국장

김현정 사무금융노조 위원장

사무금융 노동자들은 1987년 호헌철폐 투쟁을 전개했다. 화이트칼라들이 거리로 나서자 대한민국은 바뀌었다. 이후 사무금융 노동자들은 대한민국 사회변혁에 있어서 풍향계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 사무금융 노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행동했을 때 한국사회는 변화했다.

지난해 사무금융노조는 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과거 3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갈 것인가 고민했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연구용역도 진행했고, 토론회도 열었으며,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대한민국의 ‘풍향계’라고 표현했으니, 지금의 우리 사회를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불평등 문제다. 비단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렇다.

불평등 양극화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그동안 노동조합에서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그 실천이 충분했다고 볼 수 있을까? 사무금융노조가 과거 선배들의 역할을 이어 받아서 불평등 해소를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해보자고 논의가 시작되었다.

처음 논의를 시작할 때는 이견도 있었다. ‘그걸 왜 노동조합이 나서야 하는 건가? 정부와 자본에 요구해야 할 사안이다’라는 것이다.

그동안 노동운동의 흐름을 봤을 때, 노동은 늘 대상이었다. 개혁의 대상이었다. 정권과 자본이 그렇게 판을 만들어 왔던 것도 있지만, 노동조합 스스로도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런 현실을 바꿔나가기 위한 시도로 노동조합이 먼저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고 풀어나가자는 제안을 던지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정권과 자본에 노동조합이 훨씬 더 강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이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동안 노동조합운동을 반성해 보자면, 과거에는 이런 비판적인 시각이 있으면 사업을 안 해버렸다. 그게 편하니까.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도 없고.

지난 2월 대의원대회 결의 이후에, 국회 토론회, 선포식, 최초의 중앙 산별교섭을 거쳐 6개월 여만에 최초로 합의한 KB증권의 사례가 나왔다. 교보증권의 경우에도 합의를 끝내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보람 있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노동조합의 사회연대 활동은 일회성으로 그칠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사무금융노조의 이런 활동을 시작으로 타 업종과 산업에도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윤홍순 KB증권지부 사무국장

KB증권과 사무금융노조는 지난 8월 2일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연대기금 출연 조인식을 열었다. 향후 2020년까지 3년 동안 사회연대기금을 출연하며, 우선 올해분으로 8억 원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이날 조인식에서 윤경은 KB증권 대표이사는 “사회연대기금을 통해 취약계층, 특히 나라의 미래인 청년들에게 실질적이고 많은 혜택이 주어지길 기대한다”며 “지난 4월 사회연대기금 조성 선포식에서 했던 ‘이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KB증권이 앞장서서 후원하겠다’라는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논의의 과정에서 특별히 큰 어려움이 있거나 의견이 심하게 부딪치지는 않았다. 이미 기금 조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충분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선포식 석상에서 대표이사가 발언했던 것처럼 CEO의 의지가 강했고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 다른 사업장도 비슷하겠지만, 이와 같은 사안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CEO의 의지가 중요할 것이다. 금융 사업장 대부분이 그렇듯 대표이사들이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들이다.

정권이 바뀌고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사회연대기금 출연에 호의적으로 바뀐 것도 중요한 요소인 거 같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이미지 제고, 홍보 효과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박태완 KB손해보험지부 지부장

이미 결과물을 도출하는 사업장이 있는 데 반해 아직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곳도 있다. 종합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면 사회연대기금 조성에 대한 취지는 조합원들이나 사측이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임단협 교섭에 진척인 없는 상태에서 기금조성에 대한 사안이 먼저 거론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앞서 언급된 KB증권이나 교보증권의 경우, 임단협 교섭과 별도로 기금 조성에 대한 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무금융노조 차원에서도 임금교섭과 동시에 또는 별도로 교섭을 진행할 수 있다는 원칙을 정한 상태다.

또 한 가지 현실적으로 고려해 봐야 할 사안은 현재 적자가 나고 있는 사업장에서는 기금 조성 논의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이와 같은 개별 사업장의 특수성을 감안해 본조에서도 예외의 경우를 두기로 하였으며, 향후 경영적자가 개선될 시 기금을 출연한다는 협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임금교섭의 진행상황이 불투명한 가운데 조합원들에게도 기금 조성과 관련한 구체적인 사안을 언급하는 것이 꺼려진다. 가령 조합원들은 1인당 얼마나 기부하게 되는지, 여기에 맞춰 사측이 매칭펀드는 어떤 규모로 조성할지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사실 누구나가 마찬가지이겠지만, 조합원들의 심리 상태도 집행부 입장에선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임금교섭 결과가 좋아서 조합원들이 많은 부분을 누릴 수 있다면 그중 일부를 나누는 것에 큰 부담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받지 못하거나, 혹은 조금밖에 못 받았다고 느껴진다면 선뜻 내 주머니를 열기가 어려운 게 사람 심리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KB손해보험의 경우, 그동안 적립된 투쟁기금을 운용하여 올해 전태일재단,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손배가압류 손잡고, 삼성반도체 반올림 등 4개 조직에 1천만 원씩 기부를 하기도 했다. 향후에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쓰는 기관, 단체에 대한 후원을 지속해 나갈 계획이다.

이은순 교보증권지부 지부장

사회연대기금 조성을 비롯해서 노동조합의 활동이나 방침에 대해서 확실히 조합원들의 연령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다른 거 같다. 나이든 조합원들, 근속이 오래된 이들은 노조가 하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젊은 조합원들의 경우 우선 몇백 대 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들이기 때문에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익숙한 세대들이다. 이들의 시각에선 ‘이왕이면 노동조합이 내 이익에만 좀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회연대기금과 관련해선 4월부터 분회 방문을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조금 내면,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노동조합의 본연의 역할일 것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차별들, 가령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그런 것들이 사측에게 노동조합이 뭔가 정당한 요구를 할 때에도 계속해서 걸림돌이 될 것이다. 계속 나의 이익만 취하려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의식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뭐가 있어서 기부하는 게 아니다. 원래 기부는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한다. 그런 것들이 촉발시킬 사회의 변화, 굉장히 작은 것 같지만 큰 의미 있는 시작이라고 부각시키려고 노력한다.

교보증권은 좀 운이 좋은 케이스인데, 증권회사에서 사회공헌을 하는 게 사실 쉽지는 않다. 그런데 대표이사가 사회공헌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도 사회공헌 대상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취약계층을 돕는다든지 봉사활동을 하는 것. 그래서 흔쾌히 동의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

다만 저의 고민은 참여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회사가 내놓는 규모만큼은 아니겠지만, 일부라도 직원들도 참여하는. 하지만 이거를 실제로 내도록 하는 건 어렵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아온 투쟁기금을 통해 출연하는 방법도 고민 중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십수 년 전에도 소산별 단위에서 이와 같은 논의가 있었다. 가령 증권노조 차원에서 비정규직 기금, 사회연대 기금 조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런데 사업장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합원들이 우리의 복리후생, 우리의 임금에 더 역량을 집중하길 요구했던 것이다. 선출직 대표자들은 조합원 여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고민이 흔들리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