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만 더 가까이”…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길잡이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길잡이
  • 김민경 기자
  • 승인 2018.09.07 09:49
  • 수정 2018.10.18 12: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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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정성호를 변하게 한 방송 ‘잡(job)학다식’

[인터뷰] 정성호 잡합다식 MC (개그맨)

 

MBC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만능엔터테이너 정성호 씨의 활동 영역은 폭넓다. 코미디와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은 지는 이미 오래다. 현재 그는 TV유치원, 영화 소개프로그램, 드라마, 라디오 등에 두루 출연하고 있다.

노동예능을 내세운 민주노총의 ‘잡(job)학다식’ 진행자로 나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이었다. 잡학다식은 유튜브(Youtube)와 팟캐스트(Podcast)를 통해 올해 노동절(5월 1일) 최저임금을 주제로 첫 방송을 시작한 후, 지난 7월 14일 그동안의 이슈를 총 정리하는 12화의 업로드를 끝으로 종료됐다. 8월 7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정성호 씨를 만났다.

노동 잘.알.못이 진행하는 유쾌한 노동방송

‘잡학다식’은 민주노총과 국민TV가 함께 제작한 노동정보 토크쇼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가장 잘 모르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기획됐다. ‘노동자들도 모르는 노동의 잡다한 지식을 알려 준다’는 목표를 내걸고, 노동권리 찾기 프로젝트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방송 제작 단계에서 제작진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노동 관련 이슈와 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 줄 진행자를 찾는 일이었다. 오랜 방송 경험이 있는 다재다능한 개그맨 정성호 씨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사용자와 노동자에 대한 정의도, 노동의 의미도 몰랐어요. 그저 일이 있으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죠. 방송을 진행하면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권리가 상당히 많음을 알게 됐어요. 물론 일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알고 보장 받는 것은 그와 별개로 너무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잖아요.”

잡학다식에서 정성호 씨는 노동과 노조에 대해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는 질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주요 출연진인 노조 법률원 변호사와 노조 활동가의 낯선 직책에서부터 근로계약 작성 시 확인하는 취업규칙, 최저임금 제도, 노조를 만들 수 있는 조건 등에 이르기까지 매순간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SBS 라디오의 현직 DJ이기도 한 그는 방송 경험이 전혀 없는 출연진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풀어내며, 방송 전반을 안정감 있게 이끌었다.

정성호 씨의 진면목은 각 화마다 등장하는 노동현장의 사례 소개에서 또 한 번 드러난다. 방송에 출연하기 어렵지만 일하면서 겪는 부당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아르바이트생, 요양보호사, 학교 비정규직, 경비원 등이 직접 보낸 사연을 정 씨는 맞춤 목소리로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정 씨는 인물의 성별과 활동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말투와 몸짓까지 복사하는 수준으로 따라해 내는데, 실제로 그가 성대모사 할 수 있는 인물은 박근혜 전 대통령, 박태환, 임재범, 한석규, 하정우, 김수미, 김상중, 양현석, 진중권, 조국, 손석희 등 무려 60명에 달한다. ‘성대모사의 달인’, ‘천의 얼굴’로 불리는 그의 재능은 잡학다식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노동 권리 찾기’ 취지에 공감해 맡은 방송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무게를 잡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개개인의 경험과 생활에 빗댄 질문을 주고받으며 노동 이슈를 풀어내는 잡학다식의 진행 방식은 시청자들을 내용에 집중케 하는 데 주요했다. 제작진들은 개그맨 정성호 씨를 MC로 섭외할 수 있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입을 모았다.

방송인은 대중의 인기를 얻어야 산다. 노동을 주제로 한 방송을 맡는 것이 혹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한국사회에서 노동은 다른 소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주제다. 사회적인 의제를 설정하는 미디어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노동은 속성 자체가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다. 또 그 무게마저 무거운 노동관련 사안은 중요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도 외면 받았다.

“의미 있는 뜻에 함께 하는 데 목적을 뒀어요. 사실 섭외 전화를 받을 당시 스케줄이 많아서 여유가 없었어요. 잡학다식 출연 후 관계된 사람들과 꾸준히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다만 이 방송을 만들려는 이유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취지에 공감 했어요.”

정성호 씨는 웃음기 쏙 뺀 얼굴로 숨 쉴 틈 없이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흔히 배우지 못한 사람이 힘들여 하는 일명 노가다 같은 일을 두고 노동이라고 해요. 하지만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하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을 아우르는 겁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부당한 상황에 처해도 나서지 못해요. 나 한 사람만 힘들어질 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죠. 둘, 셋이 모이면 달라요.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정 씨는 노동자 스스로 권리를 찾는 방식으로 노조 만들기에 대해 말했다.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개그맨의 모습은 어색했지만, 신선했다.

노동에 대한 편견? “팩트(사실) 알면 바뀐다”

처음부터 그가 노조를 긍정적으로 봤던 것은 아니었다.

“노조들이 길거리로 나와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보다 나은 상황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노조들은 왜 저렇게 나서서 외칠까.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려는 거라고, 그렇게만 봤었죠.”

그랬던 정성호 씨가 달라졌다. 요즘은 라디오 진행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면 스스럼없이 먼저 노동과 노조에 대해,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가 방송을 하면서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게 되면서부터다.

“국회의사당이나 광화문에서 1인 시위나 집회를 하는 사람들에게 사실 관심이 없었어요. 방송 이후 비로소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마저도 최저임금과 52시간 노동시간 등 이미 법으로 정해놓은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라는 요구였고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 씨의 관심도 높아졌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어느 정도로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지 전혀 몰랐어요.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게 아줌마라고 했다가 일주일 내내 사과하며 욕을 들어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울컥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정성호 씨는 방송에도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

3화 ‘학교 안 이름 없는 선생님’ 편에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호칭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는 그는 “학교에서 청소하는 분들과 수의 아저씨들은 현장에서 김 씨, 이 씨, 아줌마 등으로 불리고 있어요. 선생님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보다 먼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에요.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울 땐 스승이라고 하고요. 학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분들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요”라고 제안했다.

7화 ‘당신은 얼마나 일하고 계십니까 : 노동시간 단축법’ 편에서 이른 저녁부터 아침까지 건물 관리 일을 하지만 노동시간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감시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선 “밤에 잠을 잔다는 이유로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 일한 시간조차 제대로 인정을 못 받아요. 정작 모두가 잠든 시간에 건물에 침입자가 들면 관리하는 노동자들의 잘못을 물으면서요. 실제 노동시간과 상관없이 기존에 정해 둔 임금만 주는 포괄임금제는 진짜 심각한 문제예요”라고 지적했다.

정성호 씨의 색다른 행보와 변화에 주변사람들은 종종 ‘연예인이면 그에 맞는 종류의 일을 해야 한다’, ‘어디 가서 자꾸 노동 권리 이야기 하지마라’, ‘그러다가 괜히 미움만 받는다’, ‘그 일은 네 경력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느냐’는 등 우려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연예인도 노동자에요. 직업이 평범한 종류가 아닌 것일 뿐이죠. 그리고 세상에 마이너스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일축했다.

노동자와 노조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 씨처럼 달라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복잡할 것이 없어요. 그냥 팩트(사실)를 읽어만 보시면 돼요”는 답이 돌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꼭 보길 바라는 방송

“누구나 부담 없이 한 번만 잡학다식을 틀어놓고 보셨으면 좋겠어요. 식사 중이나 설거지를 할 때, 청소를 할 때도 괜찮습니다. 외국의 경우 학교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교육을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잖아요.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방송을 권해요. 실은 노동자의 권리를 잘 모르는 사용자들이 보시고 뜨끔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웃음).”

정성호 씨가 12화로 이어지는 잡학다식 중 어느 편이든 ‘한 번’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으세요’라는 전편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바로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 씨는 정말로 한 편만 봐야한다면, 자신의 상황과 관련 있는 주제를 다루는 편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방송에 출연한 법률가와 노조 활동가들도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땐 노조를 찾아가라고 강조한다. 만약 노조가 없다면 더 나아가 노조를 만들어 정당한 대우를 받으라고도 조언한다. 이에 공감하는 정 씨는 “사람들은 노조라고 하면 머리띠를 두르고 한 데 모여 으쌰으쌰 하는 장면만 떠올리는데, 노조를 만들기는 굉장히 쉽습니다. 일하는 사람 두 명만 모이면 돼요. 재미있는 건, 전화 한통만으로 가능하기도 해요. 이미 노조가 설립된 곳이 많거든요. 민주노총에 전화를 걸어 일하는 곳과 직함을 알리고, 가입할 수 있는 노조가 있는지 문의해 보세요”라고 덧붙였다.

노동에 대해 전문가 못지않은 정보를 쏟아내는 그는 거듭 “제가 하는 말은 합당치 않아요. 전문가가 아니거든요”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지금까지 제가 한 모든 이야기는 수십 년 노동자들을 위해 활동해온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했던 말을 전한 겁니다. 그들이 한 말에 귀 기울였을 때 오롯이 그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타당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었어요. 단지 노동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이었죠. 제가 그 이야기를 전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노동에 관해 특정한 관점을 가지거나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밝혔다.

현재 정성호 씨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노동자로서 인식하거나 대우를 받은 경험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용자의 입장에 더 가까울수도 있겠다. 약 5년 전 대여섯 명의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하고 키즈카페를 운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날 때 쯤, 그에게 슬며시 마지막 회심의 질문을 했다. 키즈카페를 운영했던 과거로 돌아갔는데 직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면?

“당연한 거예요. 법적인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데 사장이 노조를 용납하지 못한다면 가게를 접어야죠. 마땅히 보장해야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자신의 이익만 키우려고 한다면, 장사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사기를 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거창하게 노동이라고 표현할 것도 없다. 사람이 하는 노동은 곧 사람이다. 연예인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기본으로 하는 직업이다. 연예인인 그가 이전보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고,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새로운 영역에서 또다시 끊임없이 도전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활동을 해나갈 앞으로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