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뜨겁게 공감 미래는 차갑게 대비
현실은 뜨겁게 공감 미래는 차갑게 대비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8.09.07 10:05
  • 수정 2018.09.07 1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참다 참다 불거진 창구근무직 현실에 개탄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고 했다. 서비스 산업의 폭이 넓어지면서 일 하는 내내 ‘고객’을 대면해야 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의 애환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결과다. 우정노조 경인지방본부(위원장 정태웅)가 지난해 말부터 올해 3월까지 진행한 우체국 ‘창구근무직 근무실태와 감정노동에 관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말이다.

오랜 세월 몸 담고 일한 조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문제를 진단하고 있던 이들에게도, 현장 조합원들의 생생한 절규는 깊이 와 닿았다. 정태웅 경인지방본부 위원장에게 이번 조사를 진행하게 된 계기와 소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우체국 감정노동 현실, ‘충격!’

노동조합 집행부라면 당연히 신경 쓰는 부분이겠지만, 지난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해 위원장 직선제 선출을 위한 규약 개정안을 가결시킨 우정노조는 현장 조합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더욱 바빠졌다. 전국에 산재한 2만 8천여 명 조합원들의 바람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직선제’ 시대를 맞이한 우정노조는 기존 8개 지방본부의 역할이 더욱 더 중요시되고 있다.

그러나 지방본부 단위에서도 수월한 일만은 아니다. 서울, 경기, 부산 등 대도시 권역의 조합원들은 늘 바쁜 업무와 쏟아지는 물량을 감당해야 하며, 상대적으로 물량이 적은 지역은 물리적인 거리가 걸림돌이다.

일정을 쪼개어 현장을 방문하고 조합원들과 시간을 갖기 위해 애쓰는 사이, 정태웅 위원장도 “창구근무직 조합원들이 느끼고 있는 애로사항이나 고충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런 문제가 “왜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인다.

그런 위원장에게 있어서도 이번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현장의 조합원들이 얼마나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 이런 사례들이 쌓이고 쌓여서 점점 곪아가고 있는 조직의 현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실태조사에 응한 우정노조 경기지방본부 창구근무직 조합원들이 하루 평균 고객을 응대하는 건수는 91.9건에 달한다. 하루 8시간 근무하면서 잠시의 휴식도 없이 계속 고객을 응대한다고 쳐도, 고객 한 명 당 응대 시간은 5분을 조금 넘긴다. 실제 조사를 통해 고객 1명을 응대하는 데 걸리는 최소 시간이 4.6분이라고 밝혀졌으니, 사실상 창구근무직 조합원들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밀려드는 고객들을 상대하는 셈이다.

그런 와중에 고객들의 부당한 요구, 욕설, 폭언, 폭력 등이 무시로 발생하고 있다고 조합원들은 증언한다. 응답자의 90%가 업무 중 고객으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85%가 모욕적인 비난이나 인격무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76%는 욕설이나 폭언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직접적인 신체적 위협을 경험한 적은 41%,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이는 11%,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이들도 8%였다.

정 위원장은 또한 “관리자나 상급자, 명령권자, 인사권자들이 이런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미온적인지. 무대책인 것도 모자라 심지어 상처 받은 조합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관리자들은 나 몰라라...조직 차원의 보호 필요

고객들에게 무리한 사과 요구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조합원은 51%다. 악성 민원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관리자들은 그냥 참으라고 하는 경우가 21%에 달한다.

정 위원장은 “조직이 구성원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조직에 피해만 가지 않도록 하려는 모습은 개탄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제기된 민원을 어떻게든 내리기 위해 무작정 현장 직원들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또한 “이런 모든 것들이 ‘공무원 조직’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지금껏 방치되어 왔었다”며 “공무원 조직이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왜 고객에게 상처 받고, 민원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감정적/물질적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현장의 직원들뿐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는 “현장의 조합원들은 가장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어디다 하소연할 데가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민원이 제기될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업무 프로세스 상 어떻게 처리를 하고 대응을 해야 하는지 정보의 창구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또 세상에는 워낙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는 법이니 정말 악의적으로 직원들을 괴롭히는 고객이 있을 수 있다. 비단 우체국만이 아니라 감정노동이 문제시 되는 다양한 사업장에서 나타나듯이, 현장의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겪는 이와 같은 상황은 매우 큰 충격과 상처로 남는다. 이런 피치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경우에 노동자들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상담할 수 있는 창구도 없다.

무엇보다도 현장의 조합원들이 조직에 좌절하는 것은 정작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2선의 상급자들은 먼 산을 보며 모른 척 한다든지, 고개만 숙이고 있는 상황이다.

우정노조는 현장의 심각한 인력부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고, 경인지방본부 역시 그렇다. 이번 실태조사의 응답자 분포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3인 이하 근무지가 17%, 4~5인 관서가 45%이다. 휴가자가 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결원이 생기는 경우 상황이 어떨까?

연차휴가를 사용하려고 해도 대체인력이 여의치 않아 쓰지 못한다는 응답이 78%였다. 연차휴가 사용률은 52%에 그친다. 창구근무직이 여성 인력임을 감안하면 생리휴가 사용은 거의 0%이다. 병가 역시 아프지만 눈치가 보여서 쓰지 못했다는 이들이 40%에 달한다.

정 위원장은 “지방본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시급히 처리해 나갈 것이며, 실태조사 직후 문제가 많다고 보인 사업장은 곧바로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가령 2선 관리자들의 역할이 전무한 곳 같은 경우엔 노조가 강력하게 문제제기가 가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