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훈의 프리킥] 기록 단상
[박종훈의 프리킥] 기록 단상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8.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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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프리킥
점심시간 야구 얘기가 듣기 싫어 축구를 좋아하기로 한 불경스런 축구 팬이 날리는 세상을 향한 자유로운 발길질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기자로서 좀 한가해 보이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취재 현장에서 노트북 컴퓨터보다는 수첩과 필기구가 편하다. 역시 남들이 보기엔 가끔 뭔가 좀 부족해 보이는가 보다. 누구는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는데 수첩에 혼자 끄적이고 있는 걸 보면 “월간지라 여유가 있나보네”라고 농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아니거든요! 저도 바쁘거든요.

우선 타이핑 실력이 신통치 않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손가락이 잘 쫓아가지 못한다는 핑계를 댈 수 있고, 취재 현장에서 누군가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며 내용을 전달하려 하는데 그걸 경청하지 못하고 키보드를 달그락 거리는 게 괜히 마음에 걸린다는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속도에 대한 핑계를 좀 더 자세히 대자면, 손으로 적는 게 더 빠를 때도 있다. 스스로 정해 놓은 약어나 기호를 섞으면 그렇다. 속기사가 된 거 같은 우쭐함을 느낄 수도 있고, 비밀 첩보원처럼 남들이 알아볼 수 없는 메모를 남겼다는 쾌감도 즐길 수 있다.

종이와 필기구를 쓰면 단순히 기록을 남긴다는 행위라고 말하기엔 훨씬 더 다양한 정서가 끼어든다. 종이나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나 백면(白面)으로 시작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왜인지 종이가 더 자유롭게 머릿속 나래를 펼쳐내는 거 같단 착각을 한다.

잠시 이야기하는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며 감정을 섞어보기도 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흰 공간을 채워넣을 무언가를 고민한 흔적도 수첩 위에 고스란히 남는다. 긴박하거나 열악한 현장에서도 별다른 걱정 없이 기록에만 신경쓸 수 있다. 중요한 내용을 강조해 놓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밑줄 쫙, 별표 세 개!

컴퓨터 화면에서 프롬프트가 깜빡이면 순서에 맞게 무언가 ‘명령어’를 구성해 넣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든다. 적어 놓은 내용 중간에 무언가를 첨가하고 싶으면 송구한 마음으로 커서를 이동시켜야 한다. 수첩에 메모할 때처럼 내키는 대로 화살표를 그린다든지, 말풍선을 갖다 붙인다든지,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긴 사실 좀 귀찮다. 진짜 사실은 익숙치 못한 것이지만.

귀찮음이라든지 짜증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도 그렇다. 종이 표면과 필기구가 맞닿는 감촉, 선의 굵기나 색의 짙고 옅음, 필압(筆壓)에 따른 변화, 뭐 이런 느낌들이 특정 필기구를 선호하게 만든다. 그에 반해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기록은 ‘디지털스러운’ 짜증뿐이다. 가령 프로그램이 열리거나 반응하는 속도에 대한 것이라든지, 조작이 미숙해 애써 정리한 걸 홀랑 날려먹었을 때라든지...

필기구의 역사를 조사해 보니, 뾰족한 끝으로 잉크가 흐르는 ‘펜’의 출현은 무려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무로 흑연심을 감싼 최초의 연필이 탄생한 것은 16세기이다. 만년필은 1831년에 특허 등록이 되었고, 볼펜이 등장한 것은 1935년 헝가리에서다.

국산 연필이 제조되기 시작한 것은 1946년이라고 한다. 1963년은 한국의 필기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가 아닐까 싶은데, 너무나 유명한 ‘모나미 153 볼펜’이 자체 생산되기 시작했다. 처음 출시됐을 때 가격은 15원이었는데,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나 신문 한 부 가격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사인펜과 매직펜이 출시됐는데, 지금은 보통명사로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만 사실 출시된 제품의 이름이었다. 스테이플러보다 ‘호치키스’가 익숙한 것처럼 그 물건이 곧 그 제품이 되었다.

손으로 기록하길 좋아하는 이들은 종종 특정 필기구를 편애한다. 좀 더 진지한 매니아로 진화하면 특정 브랜드를 선호한다.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서야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기록하는 행위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듣거나, 다른 행동에 걸림돌이 덜 된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기록한다는 것이 시간을 보내거나, 자신을 표현하는 즐거운 행위다. 하지만 기자에게 기록하는 것은 일이다. 일이란 것은 내게 마냥 괴로운 것도 아니고, 늘 즐겁고 보람된 것도 아니다. ‘밀당’을 즐기는 사이인 게 가장 좋은 거 같다.

가끔은 사랑을 고백할 때처럼 설레며, 때론 이별을 통보할 때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든다. 기록하는 내용과 기록하는 내가 잘 버무려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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