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환의 기습번트] 기습이다, 그리고 번트다!
[한종환의 기습번트] 기습이다, 그리고 번트다!
  • 한종환 기자
  • 승인 2018.09.17 13:54
  • 수정 2018.09.17 16: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한종환 기자 jhhan@laborplus.co.kr
ⓒ 한종환 기자 jhhan@laborplus.co.kr

나에겐 몇 명의 영웅이 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그중 한 명이다. 본명은 이진원, 원맨밴드이며 싱어송라이터다. 홍대 인디씬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대중적 히트곡은 없다. 아는 사람만 아는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돈도 없다. 그는 2007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연봉 1,200만 원, 월수입 100만 원이 안 되면 가수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를 했다. 현실은 꼭 그가 가수를 그만두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는 1973년 4월 19일 태어나 2010년 11월 6일 죽었다. 11월 1일 뇌출혈로 쓰러진 채 발견됐으나, 쓰러진 지 30시간 이상 지난 후에야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약간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결국 기적은 없었다. 요정은 그렇게 타석을 떠났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다. 관중석에서 그의 타석을 지켜보던 나는 영웅의 허무한 죽음에 말을 잃었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던 성웅(聖雄)의 비장한 죽음도 있었지만,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영웅의 죽음 또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감히 성웅을 누구와 비교하느냐는 이도 있겠지만, 누가 뭐래도 나에게 그는 영웅이기에 감히 이렇게 말한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역전도, 만루홈런도 치지 못했다. 인생에는 콜드게임 룰이 없어 엄청난 점수 차가 나도 타석은 계속해서 돌아온다. 무리한 욕심도 아니었다. 그저 '정기적인 월수입 100만 원 이상'을 바랐던 그는 점수 차이가 엄청난 걸, 그래서 질 것을 알지만 타석에서 스스로 내려오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만의 폼으로 배트를 휘둘렀고, 누가 봐도 확신에 찬 멋진 '헛스윙'을 했다. 그리고, 장렬히 패배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학교에서 배우고 사회의 시선에 어긋나지 않는 엇비슷한 폼으로 타율에만 집중한다. 그가 영웅인 역설이다.

지금도 그때처럼 난세(亂世)다. 이력서 잘 쓰기 어렵고, 잘 쓴 이력서 변형해 여기저기 넣기도 어렵고, 면접관 마음에 들게 말하기도 어렵고, 취업해도 여유 있게 생활할 돈 벌기 어렵고, 상사 비위 맞추기 더럽고, 잘릴까 겁나고, 그래서 결혼은 힘들 거 같고. 고로 사는 건 어렵고, 더럽고, 겁나고, 힘들다는 것을 이젠 좀 안다. 공은 계속 날아오는데 야구공이 아닌 것만 같다. 분명 희고 작은 저 공은 골프공 같은데, 쉽게 뻥뻥 치는 사람들을 보자니 의욕은 더 사라진다. 가만 보니 뻥뻥치는 사람들 공은 배구공 같기도 하다, 저건.

난 타율이 낮다. 칠 자신도 없다. 그렇다고 내 영웅처럼 확신에 찬, 멋지고 우아하기까지 한 헛스윙을 할 자신도 없다. 당장 오늘이 급급하고, 내일은 막막하다. 심판은 짐짓 "에이, 잘 봐줄게" 말하는데 어중간한 건 전부 스트라이크로 선언하고, 투수는 분명 골프공을 던지는 게 확실하다. 불공정하다고 화를 내고 심판이고 투수고 다 엎어버리려 벤치클리어링을 해보지만 별 효력은 없고 징계만 먹는다.

돈 벌고 먹고 살려면 우선 타석에서 살아나가야 한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폼으로는 잘 칠 자신도 없고 재미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폼을 한 번에 찾을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 번쩍 생각난다. 기습이다, 그리고 번트다! 나만의 폼을 찾아가면서 휘두르다 기습번트! 상대에겐 '맛있는 엿' 같은 존재다. 투수도 놀래키고 수비도 놀래키고 심판도 놀래키고 타율을 끌어올릴 확률도 되레 높다.

나는 나만의 스윙 폼도 없고 타율도 낮다. 그래서 당분간 회심의 기습번트로 타율을 높이고 나만의 폼을 찾아보려 한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기습번트다. 언젠가는 나만의 폼으로 역전만루홈런을 쏘아 올릴 때를 꿈꾸며 기습번트를 적시에 써보기로 한다. 나 같은 이들도 언젠간 난세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 물론 내 타석일 때 응원가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나의 노래>가 적절하겠다.

     "나에겐 나의 노래가 있다, 내가 당당해 지는 무기. 부르리라 거침없이, 영원히 나의 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