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만 원 전지현 구두, 한 켤레 만들고 7천 원 버는 구두장인들
27만 원 전지현 구두, 한 켤레 만들고 7천 원 버는 구두장인들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8.10.05 11:49
  • 수정 2018.10.05 16: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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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공임인상 이뤄졌지만 탈법적 소사장제 관행은 여전

[리포트] 성수동 제화공들의 삶

탠디(TANDY)’, ‘슈콤마보니(SUECOMMABONNIE)’, ‘세라(SAERA)’, ‘고세(GO-CCE)’.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또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 이름들은 대한민국 대표 수제화 브랜드들이다. 백화점 구두 층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고 그 가격대도 10만 원 초반부터 30만 원 후반까지 상당하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이 브랜드의 수제화를 만드는 제화공의 공임이 올해 최저임금(7,530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난달 2주간 파업과 노숙농성을 하고서야 겨우 20년 만에 1,500원의 공임을 올린 코오롱FnC 슈콤마보니 하청업체 ‘우리수제화’ 제화공 최경진 씨(56세)를 만나 이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공임은 신발 한 켤레 당 제화공이 받는 임금으로, 제화공들이 신발의 저부(밑창)와 갑피(겉가죽)를 전문적으로 분담해서 만들고 있어서 ‘공임 7,000원’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저부와 갑피 각각의 공임단가가 7,000원임을 의미한다.

1등 신랑감으로 구두장이가 꼽히던 시절

“나도 내가 이런 거 할 줄 몰랐어.”

제화 업계에 40년 가까이 몸담아온 최경진 씨는 카페 의자에 가방을 풀며 말했다. 왁스로 말끔히 세운 머리에 빨간색 조합원 조끼와 검은색 백팩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딸 가방이야. 밖에서 자면서 면도도 안 하고 다니면 노숙자 소리 듣는다고 이것저것 챙겨줬어.” 그의 가방엔 면도기를 비롯해 칫솔과 크림, 수건 따위가 단출하게 들어있었다.

이날은 그가 속한 우리수제화와 또 다른 하청업체인 ‘로씨오’, ‘지브라’ 소속 제화공들이 코오롱 FnC 본사 앞에서 공임 1,500원 인상과 퇴직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12일째 노숙농성을 벌이던 때다. 일교차가 커지면서 최 씨의 목소리도 이틀 전 결의대회에서 만났을 때보다 칼칼해져 있었다.

전라남도 목포가 고향인 최 씨가 열여섯 살에 상경해 제화공이 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돈을 무지하게 벌 수 있다고 해서.” 그는 2남 6녀 중 장남으로 한때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공부고 뭐고 당장 돈 벌 생각뿐이었다. 최 씨는 1979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틀 뒤 곧장 독산동, 지금은 가산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강서여중 옆 골목 제화공장 ‘반도제화(‘반도패션’과 무관)에 취직했다.

그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공장 구석구석이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공장이 지하 1층에 있어서 환기가 잘 안됐어. 겨울엔 본드 냄새에 취해서 어질어질했지.” 그는 3일 만에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했다. “14살 차이 나는 어린 막내 동생이 있었는데 엄마, 아빠보다도 걔가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너무 그리운 거야.”

그래도 벌이가 확실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짜장면이 300원, 버스비가 60원이던 시절 구두장이의 월급은 20~30만 원 내외로 2년을 일하면 서울에 30평이 넘는 단독주택을 살 수 있는 정도로 높았다. “예전엔 딸 있는 집 엄마들이 무조건 제화공을 사위 삼겠다고 했어.” 그는 제화업계가 호황을 누리던 1960~70년대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명동 멋쟁이는 전부 구두장이란 말이 있었다니깐.”

그의 말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서울연구원이 2015년에 발표한 ‘서울은 어떻게 변했을까?’ 자료에 따르면 1948년 제화공의 월 급여는 10.7원으로 당시 목수(12.1원) 다음으로 높았고 회사원(9.3원)과 공무원(4.4원)보다 많았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그땐 하청업체 사장들도 주말이면 직원들에게 용돈으로 쓰라고 이삼천 원씩 줬지.”

1990년대부터 시작된 3災
중국산 저가 신발 공세, 납품단가 후려치기, 소사장제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2년 8월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대거 진출했고 이 때부터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중국산 저가 신발 공세가 시작됐다. 여기에 1997년 IMF 전후로 기업 본사의 외주화와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본격적으로 이어지면서 이들의 형편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2000년 하청업체에 소속돼 일하던 제화공을 독립된 경영책임자로 인정하는 소사장제 도입으로 납품단가 협상 등 사장으로서의 경영권 행사는 유명무실하면서 사업소득의 3.3% 세금과 사회보험료 납부 등 부담만 떠안게 됐다. 소사장이 되었으니 당연히 월차와 연차도 보장받지 못했다.

최 씨는 당시 소사장제 도입에 대해 “이쪽 사람들의 80~90%가 초졸이거나 중졸”이라며 “어느 날 사장이 주민등록등본을 가져오라고 해서 준 게 전부”라고 말했다. 그는 하청업체 사장으로부터 소사장제에 따른 세금 납부나 근로자로서의 권리성 박탈 등 부정적인 변화에 대해서 아무런 안내를 받지 못했다.

우리수제화가 100% 제작해 납품하는 27만5,000원짜리 여성구두의 이익은 원청업체인 슈콤마보니가 12만8,759원, 백화점이 9만6,250원(판매가의 35%), 하청업체인 우리수제화가 5만원으로 나눠 갖는다. 5만 원은 다시 갑피와 저부 기술자의 공임 각각 7,000원, 가죽 원재료와 기타 부재료 값, 임대료, 관리직 급여, 업주 이익 등으로 쪼개진다.

본사가 납품단가를 먼저 올리지 않는 한 이들의 임금도 인상되기 어려운 구조다. 납품단가는 판매가와 무관하게 7,000원으로 고정돼 있다. 하지만 하청업체 사장들은 가뜩이나 일감도 없는 상태에서 대기업 주문을 거부하기 어렵고 항의했다간 주문 물량을 줄여 버리는 등 보복이 따를 수 있어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견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하자가 난 제품을 두고 본사 직원이 “20% 깎아서 팔래, 버릴래?”하며 갑질을 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응할 수밖에 없다. “백날 하청 사장에게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법적으로 이미 사장인 이들이 원청인 코오롱FnC본사 앞에서 공임을 올려달라고 노숙농성을 벌이게 된 속사정이다.

공임 7,000원 × 하루 [ 17 ]시간 × 근무일 20일 = 월급 250만 원

신발 한 켤레를 만드는 데 보통 1시간 정도가 소용되는 것을 고려하면 하루 8시간을 일했을 때 5만6,000원을 벌 수 있다. 이 때문에 제화공들 대부분이 한 달에 300만 원(하루에 15~16켤레)을 채우기 위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며 16시간 이상을 일하는 등 무리하며 일하고 있다.

최 씨는 슈콤마보니가 국내 1세대 디자이너 수제화 브랜드로 타 브랜드에 비해서 공정이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신발 한 켤레를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도 버는 돈이 더 적은 역설이 발생한다.

최 씨는 “파업을 하면서 저녁 6시쯤에 직장인들이 퇴근하려고 성수역으로 줄지어 가는 모습을 어색하게 지켜봤다”며 “우리는 밤11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인데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우리는 그 시간에 퇴근하면 호주머니에 돈이 없다”고 박완규 제화지부 탠디분회 분회장이 말을 거들었다. 이처럼 열악한 근무 조건 탓에 제화공들 사이에는 “우리가 어떻게 사장일 수 있냐”, “차라리 ‘노가다’는 퇴근이라도 일찍 할 수 있지 않냐”는 불만이 새어 나온 지 오래다.

유명한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40년 구두장이’ 최 씨를 비롯해 구두 장인들이 성수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몇은 스스로에 대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데가 없기 때문”이라며 비관했다.

최 씨의 구두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는 성수동 제화 업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실력을 갖춘 전문가다. 최 씨는 본사에서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공정해설’과 ‘기술지도 교육’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슈콤마보니가 독특한 소재를 많이 쓰기 때문에 소재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며 “뜨내기가 많은 제화업계에선 디자인 시안만 보고도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이가 드물다”고 말했다.

최 씨가 2014년 우리수제화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고급 수제화의 까다로운 공정이 익숙하지 않은 동료 제화공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매일 양복과 구두를 차려입고 출퇴근을 할 정도로 프로의식이 대단했다. 그런 최 씨의 공임은 다른 제화공과 같다.

최 씨는 ‘그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경력이 있으면 차라리 개인 브랜드를 갖는 게 낫지 않냐’는 물음에 “회사를 직접 차렸던 적도 있지만, 한국에선 브랜드 지명도가 낮은 수제화가 외면받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나마 대기업 하청회사에서 일해야 일감이라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시장 신발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면 공정이 까다롭지 않아서 같은 시간 내 더 많은 신발을 만들 수 있다”면서도 “그곳에선 새롭고 독특한 디자인을 만들어볼 기회가 적다”고 말했다. 돈만을 벌기 위해 단순한 구두 생산에 몰두하기엔 40년 경력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셈이다.

탠디 계기로 당장 공임인상은 됐지만...

그런데 왜 하필 그들의 투쟁은 지금이었을까. 최 씨는 탠디 사례가 큰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4월 탠디는 7,000원이었던 공임을 500원 더 깎으려 했고 이에 하청업체 제화공들이 크게 반발하며 파업과 점거 농성으로 대응했다. 사측은 결국 공임 1,300원 인상과 노사협의회를 상·하반기 각 1회씩 열어 소사장제 폐지 등을 논의하는데 합의했다.

이후 지난 7월에는 세라와 고세, 8월에는 라팡제화 하청업체 소속 제화공들의 공임인상과 처우개선 등에 관한 단체협약이 줄줄이 이어졌다.

“여기 사람들이 평생 짓눌려 산 세월이 몸에 배어서, 자기네가 만 원 어치 일하면서도 제 목소리를 못내. 주눅이 들어서. 뒤에선 같이 불만을 얘기하다가도 하청업체 사장이랑 본사 직원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

그는 제화공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시작하자 하청업체 사장들이 “나중에 민주노총이 돈을 요구할 거다”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가짜뉴스를 흘리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쪽 업계 사람들이 처우가 안 좋으면 바꿔 달라고 요구를 못 하고 옮기기를 반복해왔다”며 “그러다 보니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랫동안 기업들만 이득을 취해왔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파업은 2주 만에 마무리됐다. 처음에는 하청업체 제화공과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아니어서 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던 사측이 ▲공임단가 저부와 갑피 각각 1,500원 인상 ▲표준 공임단가 교섭 매년 1회 실시 ▲9월 17일자로 업무 복귀 등에 9월 14일자로 합의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반쪽짜리 승리란 지적이 잇따른다. 공임인상은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 문제의 핵심인 소사장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화업계의 소사장제 도입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영이 어려워진 제화업체가 부려온 꼼수다. 하청업체 제화공들이 실질적으론 원청의 지휘와 감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형식적으로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노동권을 요구할 수 없는 현실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노숙농성과 집회 현장에서 만난 제화공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 하는 인터뷰 와중에도 계속 기자의 발쪽을 곁눈질 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구두가 있었다. 천상 ‘구두장이’들이었다. 자신들이 만든 구두의 가치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