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의 불을 꺼라!
등대의 불을 꺼라!
  • 강은영 기자
  • 승인 2018.10.05 11:44
  • 수정 2018.10.05 11: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년들의 새로운 노동조합 모델

지난 9월 3일 게임업체 넥슨에 노동조합이 설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이 지나고 스마일게이트에도 노동조합이 설립됐다는 것이 알려졌다. IT업계의 큰 손인 네이버에 노조가 설립된 후 게임업계에도 노조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불모지 게임산업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는 생각이 노동조합 설립으로 이어지게 됐다. 지난 해 ‘구로의 등대’라는 별명이 붙으며 넷마블의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가 주목을 받았다. 차상준 스마일게이트지회장은 “터질 게 터졌다”며 “그동안 이렇게 잠잠했던 것 자체가 신기했다”고 게임업계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배수찬 넥슨지회장은 “서로 업무가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동료들끼리 조심하자고 했다”고 덧붙였다.

게임업계는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직원들은 대다수가 20~30대이다. 한 회사에서 장기간 근무하기 보다는 게임회사를 돌고 도는 이직이 잦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5년 이상 근무한 직원 수가 많지 않다고 한다.

넥슨은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카트라이더’ 등 한번 쯤 들어본 게임을 제작한 회사다. 상대적으로 스마일게이트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크로스파이어’라는 전 세계 동시접속 800만을 기록한 적이 있는 게임을 제작했다. 또한, 최근 방영된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속 남자 주인공인 배우 정해인이 근무한 게임 회사의 모델이 스마일게이트다.

7월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된 주 52시간제는 게임업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직원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제시안을 내미는 회사에 태도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노조 설립을 생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차 지회장은 52시간제 시행을 앞둔 바로 그 전날인 6월 30일 회사와 사인을 해야 했다. 근로자대표로 권한을 위임 받은 것은 6월 29일로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 있어도 사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넥슨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배 지회장은 근로자위원으로 회사와 직접 유연근무제에 대해 교섭을 하면서 힘의 부족함을 절감했다고 한다.

노동조합 설립을 위해 가장 먼저 고려했던 것은 ‘네이버’였다. 네이버노조는 지난 4월 IT업계 최초로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들이 화학섬유식품노동조합을 상급단체로 선택하게 된 데에는 네이버노조의 공이 컸다. 차 지회장은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네이버 노조가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고 밝혔다. 노조 설립을 준비하는 2개월의 시간동안 물심양면 네이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넥슨과 스마일게이트는 장소 대여부터 시작해 활동에 대한 여러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

노조 설립을 알린 후 직원들의 분위기는 폭발적이었다고 전했다. 넥슨은 설립 일주일 후 750여 명이 조합 가입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배 지회장은 “이렇게까지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원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소감을 전했다. 스마일게이트 역시 노조 설립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 300여 명이 가입 신청서를 냈다고 밝혔다. “조직률 10%를 넘기는 것이 목표였는데 전체 직원 2천 명 중 조합원 수가 300명을 넘기면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게임업계답게 노조 이름도 범상치 않다. 넥슨은 ‘스타팅 포인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수찬 지회장은 “게임업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노동자 권리의 시작점부터 만들자는 의미”라며 “게임 쪽 용어로는 게임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스마일게이트는 ‘SG길드’다. 차 지회장은 “길드는 게임에서 많이 쓰는 용어”라며 “사실상 노동조합의 옛 이름인 기술자들의 모임에서 착안했다”고 설명했다.

크런치 모드를 워라벨 모드로

게임업계 근로환경의 문제점은 여전히 ‘크런치 모드’라고 말한다. 크런치 모드는 개발 마감 시한을 맞추기 위해 잠, 먹을 것, 씻는 것, 사람 만나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일에만 집중하는 상태이다. 게임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판교의 경우 보통 11시에 업무를 마치는 경우가 많다.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일대에는 서울택시와 성남택시들이 직원들을 태우기 위해 줄을 이루고 있는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넥슨은 주로 게임 론칭이나 업데이트가 다가왔을 때 직원들이 크런치 모드에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두 달이 걸리는 일을 한 달 안에 끝내야하기 때문에 업무량과 강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큰 팀이 크런치 모드로 들어가면 40명이 들어가는 수면실이 가득차기도 한다고 전했다.

스마일게이트 상황도 다르지 않다. 심하면 주당 100시간 근무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자식이 있는 직원들은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로 오랜만에 본 아이가 너무 커서 대화가 안 된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주 52시간제가 시행된 지 2달이 지난 지금 업무시간은 줄어들었을까?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당장 줄어들기는 힘든 상황이다. 제도시행 전부터 이미 계획된 일들이 있기 때문에 계획을 바꾸지 않는 이상 직원들에게는 압박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들은 52시간 이상 일을 해야 끝낼 수 있는 스케줄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밝혔다.

초과근무를 해도 수당이 거의 없어 포괄임금제에 대한 문제도 심각하다고 말했다. 회사의 재무제표를 확인 해 본 결과 매년 회사는 경영상 어려움을 토로하며 수익이 준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수익률이 높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수익에 대한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몇 년 전, 임금을 근무한 시간으로 역산해 시급을 계산해 본 결과 당시 최저임금보다 낮은 금액이 나온 적 있다고 한다. 게임이 좋아서 온 사람들에게 열정페이를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는 회사를 문제 삼았다.

고용불안 문제도 게임업계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차 지회장은 “한 게임회사에 장기간 근무할 수 없는 건 프로젝트가 취소되면 전부 다 회사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라며 “정규직인데도 불구하고 비정규직과 똑같이 대우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프로젝트가 와해되면 회사에서 사직을 권고하는데, 게임업계 직원들은 권고사직의 분위기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노조 설립을 반기는 직원들도 많았지만,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직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젊은 노동자들에게 있어 노동조합은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빨간 조끼’, ‘머리띠’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굳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차 지회장은 “노동조합이 없는 상태에서 젊은 세대들이 엄청난 착취를 오랫동안 받고 있다”며 “노조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는 촛불 세대다. 기존의 노동조합과 다른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노조 문화

넥슨지회와 스마일게이트지회는 교섭권 확보에 들어갔다. 넥슨은 12일 교섭권 확보 후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통해 정책과 교섭 안을 준비한다. 실제 교섭은 추석 이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마일게이트 역시 14일 교섭권 확보 후 노조를 인정받고 장소 제공이나 전임자 인정 등 기본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회사와 진행할 예정이다. 취업 규칙과 관련해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임금에 관한 부분도 순차적으로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회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처음 노조 설립을 위해 찾아갔을 때 두 지회장은 “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임 회사를 돌고 도는 특성 때문에 큰 회사 몇 곳에서 노조가 생긴다면 다른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연이어서 노조 설립을 알린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고 밝혔다.

차 지회장은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이 무서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며 “당연히 있어야 하고 노동3권을 누리기 위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라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설명했다.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노동조합 문화를 형성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강조했다. 스마일게이트 노동조합 홈페이지는 젊은 층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기존의 노동조합 홈페이지의 경우 노조 깃발이나 로고가 메인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스마일게이트는 고양이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모습이 홈페이지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처음 이 모습을 접한 노조 관계자들은 홈페이지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차 회장은 “젊은 세대들을 위한 노조 할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며 “이전의 결의대회는 빨간 띠를 두르고 깃발을 휘날렸다면 우리 세대는 스테이지를 만들고 디제잉을 할 수도 있다. 게임업계의 특성을 살려 코스프레를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와서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화섬식품노조의 대표적 젊은 조직인 네이버노조와 넥슨지회, 그리고 스마일게이트지회는 청년연합을 계획하고 있다. 차 지회장은 “사회와 지역, 사람들과 상생할 수 있는 모습이 만들어져야 다음세대들에게도 노동조합이 당연히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IT와 게임업계가 만들어가는 새 시대의 노동조합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차 지회장은 “일하는 사람들도 즐거워야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며 “게이머들에게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