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영의 콕콕] 각자도생의 시대, 살아내기, 살아가기
[김란영의 콕콕] 각자도생의 시대, 살아내기, 살아가기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8.10.10 18:09
  • 수정 2018.10.10 18: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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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영의 콕콕] ‘콕콕’은 야무지게 자꾸 찌르는 모양을 뜻하는 의태어입니다. 상식과 관행들에 물음표를 던져 콕콕 찔러보려 합니다.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나이도 모른다. 사는 곳도 모른다. 심지어 언제부터, 몇 시부터 그곳에 나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 년이 넘도록 그를 마주했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계단을 오를 땐 그가 정말 잠을 자고 있는지를-그가 항상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내려갈 땐 듬성듬성 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연분홍색 살갗을 남몰래 훔쳐볼 뿐이었다.

그 노인은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쭈그려 앉아 있었고 그의 옆엔 붉은색 조각 천이 '성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성스러운 천 위엔 닳아빠진 성경 한 권과 백 원짜리 동전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그의 지팡이도 그와 나란히 서 있다. 나는 그 지팡이를 볼 때마다 금방이라도 벽에서 미끄러져 굴러떨어질까 봐 노심초사 하였다. 노인과 지팡이는 단단하게 땅과 벽에 붙어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위태롭게 보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의 낮잠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4번 출구로 나가려면 그를 만나야만 했다. 어떤 때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1번 출구로 돌아 나갔다. 그러다 한 번씩은 지폐 몇 장을 떨어뜨리고 왔다. 하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표정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일도 그는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다. 반갑게 인사하기 어렵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겨우 유지하고 있던 그 때, 내 형편이 이러한데 도대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사회학자 C.라이트 밀스는 지식인의 임무 중 하나가 시민들에게 ‘사회학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과 사회를 연결해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는 사고 능력. 그 사회학적 상상력이 있어야 개인이 공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상상력에 괴로워 우는 날이 많았다. 친구는 나더러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라고 조언했다.

‘각자가 스스로 제 살길을 찾는다’라는 뜻의 각자도생(各自圖生). 한국에선 하나의 생존 원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각자도생이 본래 조선 시대 대기근이나 전쟁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는 대기근도, 전쟁도 끝났지만 내내 절박한 삶의 연속이었던 모양이다.

'작가'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진보주의’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또는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론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을 뜻한다. 그러면서 그는 보수정당을 싫어하는 이유로 ‘인간의 욕망과 본능 가운데서도 가장 원초적인 것들, 이를테면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 강자의 오만과 약자의 굴종 등을 부추기고 대변하기 때문’이라고 꼽았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불편하고 어색하다. 도대체 나와 저 노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0대 한창인 내가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높든 말든, 노인 자살률이 높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면 그만이다.

아버지는 내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은 나도 가지 말라 하셨다. 나는 곧장 남들이 안 하니까 내가 하면 더 승산이 높은 것 아니냐고 대꾸했다. 아버지는 그날 처음으로 밥상을 엎으셨다.

내 삶의 목표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것.

우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우리 세포 속에 질기게 박혀 있는 이 각자도생의 논리를 찔러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찔러 대서 나를 세상물정 모른다고 생각하는 당신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하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