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의 노크노크] 쌍용자동차 두 번의 합의, 아빠와 나
[이동희의 노크노크] 쌍용자동차 두 번의 합의, 아빠와 나
  • 이동희 기자
  • 승인 2018.10.26 13:02
  • 수정 2018.10.26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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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의 노크노크] 기자의 일은 두드리는 일

ⓒ 이동희 기자 dhlee@laborplus.co.kr
ⓒ 이동희 기자 dhlee@laborplus.co.kr

“합의할 때 거기 있었어. 공장 밖에서 집회도 했었던 거 같은데.”

얼마 전 알게 된 새로운 사실 하나. 쌍용자동차 노노사 합의문을 발표한 지난 2015년 12월 30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 내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

아빠와 나는 대화가 많은 부녀 사이는 아니지만 같이 밥을 먹을 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보통은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를 갔는지, 무슨 기사를 썼는지 등을 말하면 아빠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정도라서 대화라고하기도 민망하지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포스코에 노조가 만들어졌어. 오늘 두건이랑 가면으로 얼굴 가리고 첫 기자회견도 했어.” “노조가 만들어지는 것보다 가입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하지.” 이렇다. 시큰둥하다.

지난 여름에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야기가 나왔다.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 조합원의 자결로 대한문 앞에 분향소가 막 설치됐을 때였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아빠가 툭 던진 말이 저거다. 2015년 12월 30일 노노사 합의 당시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 아빠가 있었다는 것. 아마 공장 안까지 들어간 건 아니고 공장 밖에 있었지 싶은데.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날 거기 있었다고? 일부러 합의하는 걸 보려고? 잠시 멍해 있다가 겨우 입을 뗐다. “왜?” “왜긴 그냥 구경하러 갔지.”

그냥 구경하러 갔다는 아빠의 대답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왜? 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평택 시민도 아닌데 합의하는 날 구경하겠다고 공장 앞까지 간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지금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유의 몸이 되셨지만 아빠는 자동차업계와는 관련이 없는 곳에서 일하셨고, 덧붙이자면 노동조합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이 없었다.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아빠가 평택공장 앞에 있었던 그날로부터 약 3년이 지났다. 2015년 노노사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지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9월 14일 노노사정 합의를 통해 공장으로 돌아가게 됐다. 해고노동자들에게 지난 9년은 경제적 어려움, 차별과 소외로 얼룩져 있던 시간이다. 복직 이후에도 해결해야 할 손해배상과 가압류 문제, 국가폭력 진상규명 문제가 남아있다.

2018년 노노사정 합의 현장에는 아빠 대신 내가 있다. 지난 17일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장을 만났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관련 취재 중에 “해고노동자 모두가 복직하고 복직한 노동자들의 건강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이들의 상처가 아물어지는지를 연구해 보고 싶다”고 말한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의 말을 전하면서 물었다. “실제로 앞서 먼저 복직하신 분들을 보면 건강해지시는 게 눈에 보이나요?” “그럼요. 전원 복직해서 진짜 그런 연구가 진행됐으면 좋겠네요.”

그날 아빠와의 대화가 기억에 남은 이유는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 아빠가 접점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 기뻤기 때문이다. 마감이다 뭐다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계속 가지 못했다. 얼른 집으로 가서 물어보고 싶다. 아빠가 본 이번 노노사정 합의는 어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