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영의 콕콕] 불온상상(不穩想像)
[김란영의 콕콕] 불온상상(不穩想像)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8.11.08 15:11
  • 수정 2019.04.06 21: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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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영의 콕콕] ‘콕콕’은 야무지게 자꾸 찌르는 모양을 뜻하는 의태어입니다. 상식과 관행들에 물음표를 던져 콕콕 찔러보려 합니다.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작가 김훈은 산문 <광야를 달리는 말>에서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조국으로 돌아온 그의 아버지 김광주를 ‘황무지 같은 세상 속에서 질주하는 야생마’에 비유했다. 김훈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에게 조국은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못 됐다. ‘으스러지게 부둥켜안고 싶고, 그 품에 안기고 싶지만, 일경 칼자루 밑에 찍소리도 못하는 조국. 우리에게 몸부림만 치게 하는 조국’이었기 때문이다.

김광주는 김기림의 시에서 ‘흰 나비’가 된다. 바다가 ‘청 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 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오는.’

바다엔 꽃이 피지 않는다. 그러나 나폴나폴, 나비의 상상의 날개짓은 얼마나 어여쁜가. 나는 이 흰 나비들의 발칙한 상상에 매료돼 그들의 생각들을 한 자 한 자 공책에 박아 적고 말았다.

본래 ‘장소의 가짐’을 뜻했던 ‘소유(所有)’가 근대에 들어 ‘사유(私有)’의 개념으로 변질했다고 통찰한 한나 아렌트. 그의 통찰 때문에 에리히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사유냐 존재냐>로 다시 번역돼야 할 듯싶다. ‘사유’가 프롬이 의도했던 ‘소유’의 함의를 보다 적절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아렌트에게 사유는 소유와 다르게 자의적으로 처분, 양도가 가능한 ‘동산의 것’이었다. 반면에 소유는 특정한 장소와 결합해 있는 개념이어서 부동산 성격을 지녔다고 봤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는 재산의 몰수보다 거처 자체를 앗아가는 ‘추방’이 더 무거운 벌이 됐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릇된 위정자들을 ‘감옥으로!’가 아니라 ‘나라 밖으로!’라고 외치는 편이 더 현명했을까?

아렌트는 오늘날을 ‘(장)소유가 없는 사회’로 규정했다. 여기서 ‘(장)소’는 ‘타인이 존재하는 영역(=공적 영역)’이다. 아렌트는 우리 사회가 타인이 부재한, 그래서 타인과 관계 맺기도 불가능한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압도했다고 지적했다. 아렌트의 ‘소’는 우리가 모두 예외 없이 나고 죽는 곳, 이 땅 ‘지구’로도 의미가 확장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소유가 없는 사회는 곧 '지구를 가지지 못한 사회'를 뜻하기도 한다. 나는 ‘소’의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유’하지 못해서-가진 땅이 없고 공동체적 삶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아렌트의 주장에 ‘옳거니!’ 하며 무릎을 쳤다.

마르크스 초창기 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피에르 프루동도 31살 때 <소유란 무엇인가>를 묻고 ‘도적질’이라 답했다. 프루동은 땅 주인들이 어떻게 그 땅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적해서 올라가다 보면 궁극적으로는 누구의 것도 아닌 땅에 자신의 울타리를 제일 먼저 치고 대대손손 물려준 자의 ‘선수 치기’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유의 역사는 거대한 사기극과도 같다는 것. 참으로 괴팍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선착순의 논리로는 땅 주인들의 갑질을 정당화하기에 부족하므로. 당시는 1793년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떠오른 부르주아들이 인권선언에 사유재산권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권으로 ‘결정’하면서 보편진리로서의 사유의 역사가 태동할 때였다.

이후 존 로크는 ‘타인을 위해 충분히 그리고 양질의 것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단서를 단 후에서야 사유재산권을 자연권으로 인정하는 소심함을 보이기도 했다.

토지 소유에 관해서는 공익적 필요에 따라 토지 소유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토지 공개념’을 주창한 헨리 조지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대통령 개헌안은 이를 구체화하려다가 ‘공산주의 헌법’이란 낙인을 얻고야 말았다. 사회주의적이면 좀 어떤가. 조금씩 양보해서 나눠 갖자는 것인데. 어차피 본래 너의 것도 아니었다면.

아렌트는 ‘사고하지 않음’을 ‘악’으로 규정했지만 나는 ‘상상하지 않음’을 악으로 정의하고 싶다. 불온한 상상이 있기에 조금씩 사회가 달라져 왔다고 믿기에. ‘언제면 현실의 사람들을 데리고 영화를 만들거냐’는 질문에 ‘도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며 되받아쳤던 팀 버튼처럼.

나는 오늘,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현학'을 늘어놓는 오만함도 가끔은 '발칙한 상상'의 영역으로 용납되는 사회를 꿈꾸는, 그런 '불온한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