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48주기, 기록으로 그를 다시 읽다
전태일 열사 48주기, 기록으로 그를 다시 읽다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8.11.12 19:17
  • 수정 2018.11.1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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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가 진심으로 원했던 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 13일, 22살 청년 전태일은 서울 청계천 평화광장 버들 다리 위에서 외쳤다. 그리고 온 몸에 휘발유를 부었다.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내일(13일)은 전태일 열사의 48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그의 자취를 살펴본다.

평화시장 노동 실태 얼마나 열악했나.

전태일은 17살이 되던 1965년 평화시장 학생복 맞춤집(삼일사)에 '시다'로 취직한다. 금새 일에 적응한 태일은 곧 미싱보조가 되었고, 삼일사에서 배운 기술로 다음해 가을에는 평화시장 뒷골목 통일사에서 어린 아이들의 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거듭난다. 그러나 기술을 배워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고 배움의 길을 이어가려던 그의 꿈은 평화시장의 처참한 노동현실 앞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환경,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없는 사각지대. 특히 그는 집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한창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열 두 세살의 어린 여공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허리를 펴고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작업장. 햇빛도 들지 않는 그 밀폐된 공간 안에서 닭장 속 닭들처럼 빼곡히 앉아 있는 아이들. 온종일 재봉틀 소음과 먼지, 주인으로부터 각종 욕설과 폭력에 시달리면서 일을 해도 일당은 겨우 70원.  왕복 교통비를 빼고 집안 생계에 조금 보태고 나면 끼니 사먹을 돈도 남지 않는다. 

태일은 어린 여공들을 개인적으로나마 도와주기 위해 재단사가 되는데, 실제로 재단사가 된 후에 아픈 여공들을 위해 돈을 털어서 약값을 대주기도 하고 통증에 괴로워 할 때면 일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만 하지 않았던 태일'을 곱게 보지 않았던 업주는 결국 태일을 해고한다.

이때 전태일은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느끼며 조직된 힘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곧 친구들과 함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재단사 모임, '바보회'를 조직하게 된다. 바보회는 설문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조사했는데, 그 결과를 정리한 전태일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정신적, 육체적 최하 노동'. (바보회가 만든 설문지는 평화시장에 돌리는 과정에서 업주들에게 방해를 받았고, 일년 뒤 바보회의 후신인 '삼동친목회'가 미처 다 돌리지 못했던 설문지를 돌리게 된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9,000명은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 30분까지 하루 14시간을 일했다. 하지만 휴식시간은 단 한 시간. 노동자 만 명 이상이 모여 일하는 곳인데도 환기시설이 하나도 갖춰지지 않았다.  창문이 있어도 열고 닫을 수가 없어서 작업장은 뿌연 먼지와 악취로 가득했다. 조명이 어두워 실내는 대낮에도 캄캄했다. 그래서 당시 평화시장에서 5년 이상 일한 노동자들의 경우 신경성 소화불량과 호흡기 질환, 신경통 등 각종 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그는 고발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 뒤 작성한 내용. 자료출처=전태일재단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 뒤 작성한 내용. 자료출처=전태일재단

 

1달 920시간 중 372시간. 휴일은 매달 첫 주일과 삼주일 2일

국제 근로 기준의 2배에 해당하는 시간임.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각종 환자임.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루마치스가 대부분임.

 

공임은 우리나라에서 여기보다 더 싼 데가 없음. 경영주들은 서로 경쟁을 직공들의 공임에서 함. 하루에 15시간을 작업하고도 1개월 급료가 10,000원밖에 안됨.

 

시다. 평균 15세 어린이들로써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당해내지 못함.

전태일은 실태조사를 마친 뒤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가 진정서를 낸다.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 자료출처=전태일재단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 자료출처=전태일재단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 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 당하고 오직 고삐에 메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곧 그렇게 하는 것이 현 사회에서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만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를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시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 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감독관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사정을 듣고 조만간 시정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할 것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근로감독관은 태일의 이야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알았으니 서류를 두고 가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버린다.

전태일은 이날의 기억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69년 서울특별시 근로감독관실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심사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편,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린 뒤 태일은 업주들 사이에서 '위험분자'로 소문이 나, 다니던 직장에서도 다시 해고를 당하고 한동안 평화시장 일대에 발을 못붙이게 된다. 이를 지켜본 바보회 회원들은 또다시 바보회 일에 개입했다가는 태일처럼 업주의 미움을 사 피해를 볼까봐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 바보회가 해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1970년 3월 17일. 전태일은 일기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고민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업주들이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직접 모범업체를 설립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종업원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려고 했던 야무진 꿈도 녹아 있다.  

1970년 3월 17일 전태일이 쓴 일기. 자료출처=전태일 재단
1970년 3월 17일 전태일이 쓴 일기. 자료출처=전태일 재단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무엇을--제품계통에서 근로자를 위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일

누구와--제품계통에 종사하는 어린 기능공들과

언 제—1970년. 음력 6월 달 이전에

어데서-- 서울평화시장에서

 

이일을 하려면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1969년 4월 달 부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문제는 1968년 12월 달에 착상한 것이다. 나 자신이 꼭 해야 될 문제로 생각했다.

▲ 그러나 1969년 서울특별시 근로감독관실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심사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사업 계획을 세워 놓았고 나를 도와서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사람이 주위에 있다. 때문에 사업자금만 준비되면 일의 80 % 이상을 행한거나 다름없다.

B.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친척들 중에도 나의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될(댈)만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가진 것 중에는 사회에 내어 놓을 것이라고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즉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할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의 자금주를 소개 받을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사업을 꼭 이루고야 말 결심이다. 아래 행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주 BC 사업주에게 행할 수 있는 이득 된 조건 제시 나는 이 사업이 3~5년간 내가 전 권한을 책임지고 맡는 대신에 이 사업이 완전한 궤도 위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 할시기엔 아무런 조건 없이 전부를 자금주에게 반환할 것이다

자금주는 나의 온 정렬과 한 눈을 바친 알찬 결실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이 좋기 때문에 투자를 할 것이다.

 

나는 이 사업이 끝나면 경제계에서 떠나서 주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이다.

 

1970년. 3월 17일. 10시

전태일

인간은 죽지 않는다.

만일 인간이 죽는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때문에 금간도 죽지않아(았)다.

물론, 모범업체 설립의 꿈은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고 전태일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옛 동창 앞에서 자기 선전을 한다. 

J 자신이 자기를 극도로 과장해서 선전하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얼마 안 있으면 곧 되는 것처럼 J 동창들에게 과장해서 자랑하며 실로 어처구니 없는 미래의 자기 위치를 설명한다. 즉, 기능공에 대한 교육기관을 건축하고 오락시설을 겸비하며…

ㅇ기에 일동은 잠시나마 벅찬 감격을 느낀다. J 자신도 자기 자신이 정말 그렇게 되는 줄로 잠시나마 생각하다가 자기만이 느끼는 사회환경에 몸서리치면서…

 

-당시 전태일이 구상하고 있었던 소설 내용 중 

전태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편지는 끝내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태일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 편지. 자료출처=전태일재단
전태일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 편지. 자료출처=전태일재단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 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중략)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진심으로 원하는 일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쫓겨나 공사장을 전전하면서도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평화시장에 돌아가서 삼동친목회를 만들고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는 등 근로조건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앞 장 섰다.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은 사회 1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고 이에 용기를 얻은 삼동친목회 대표자 세 사람(전태일, 김영문, 이승철)은 바로 다음날 '평화시장주식회사'에 찾아가 7가지 건의사항을 요구했다.  

회사는 "일단 알겠다"고 하면서 "지금 상황으로는 어려우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환풍기 설치와 조면 형광등의 대체 등은 힘써보겠다"고 답했다. 당시 노동청 근로기준 국장이었던 임정삼도 삼동친목회 회원들을 찾아와 "일단 취직부터 하면 일주일 내로 다 개선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자 삼동친목회는 10월 24일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그마저도 경찰들의 방해로 실패로 끝나자 다음달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기획하게 된다.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평화시장 곳곳에 경찰들이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고 형사들의 눈을 피해 평화시장 건물 3층에서 상황을 살피던 회원들은 조심히 내려와 플래카드를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러나 이내 경찰들에 의해 빼앗기고 찢겨졌다.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는 너무나 쉽게 찢어졌고 몇 명의 회원들은 이미 형사들에게 심하게 맞으며 끌려가고 있었다. 이때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한 뒤 근로기준법 책을 두고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갑자기 전태일의 전신에 불길이 휩싸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그는 곧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하룻 밤을 넘기지 못했다. 

전태일의 죽음 뒤 한국의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같은 해 11월 평화시장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설립됐고 이후 1973년 신진자동차, 원풍모방, 동일방직 노동조합 등 대기업의 노조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1970년대에만 전국에서 약 2,500여개의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전 지역과 전 업종에 걸쳐 폭발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투쟁 등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그것은 그가 그러했듯 언제나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약자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새벽에는 구두닦이, 낮에는 시다, 밤에는 껌팔이를 하던 시절의 전태일. 자료출처=전태일재단
새벽에는 구두닦이, 낮에는 시다, 밤에는 껌팔이를 하던 시절의 전태일. 자료출처=전태일재단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전태일의 1970년 초 작품 초고에서

참고자료: 전태일재단

<전태일 평전> 조영래 저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