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체결 원년’, 통상관련법 제정 시급하다
통상협정 “그때 그때 달라요?”
‘FTA 체결 원년’, 통상관련법 제정 시급하다
통상협정 “그때 그때 달라요?”
  • 승인 2005.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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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칠레 FTA, ‘비싼 수업료’ 효과는 ‘제로’

 

첫 공식협상 시작 후 최종 발효까지 걸린 시간 6년. 세 번의 국회비준 실패. ‘밑빠진 독의 물’이라는 비난 여론이 쇄도하는 119조원의 피해지원 자금. 추산이 불가능한 집회 시위 관련 피해 건수와 사회적 갈등 비용.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었던 칠레와의 협상은 ‘실패작 중의 실패작’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한-칠레 FTA의 실패가 무엇보다 직접적 피해 당사자로부터의 의견수렴과 조정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에는 이미 정부도 ‘동감’을 표시한 바 있다. 하지만 7개 협상대상, 22개 나라와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 체결 원칙을 세워놓고 있는 상황에서도 ‘동감’ 이상의 대책은 없는 상태다.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일 FTA가 한-칠레 때보다 훨씬 더 큰 사회갈등을 불러 올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통상협정은 산업 고도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구조조정과는 달리 강제적인 산업구조 재편과 구조조정을 수반한다. 때문에 한-칠레 FTA에서 농업부문처럼 통상협정 체결에 의해 산업구조 전반이 흔들리는 이해 당사자들의 반발과 갈등은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칠레 FTA의 잇따른 비준 무산으로 “국제적 망신거리가 됐다”는 정부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나라에서 통상협정 체결이 사회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형식에 그치는 국회 역할
자유무역협정이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 나라들에서는 이해당사자간 광범위한 의견 수렴 절차를 법제화하고 그에 맞는 기구를 설치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통상협정 체결은 관련 법령과 추진기구, 의견수렴 절차 자체가 모호하다.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현재로서는 유일한 국민의견 반영 창구인 국회의 법적권한에서부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헌법이 대통령에게 조약의 체결과 비준할 권한을 직접 부여하고 있지만(제73조), 동시에 국회에게 중요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주어(제60조) 대통령의 외교행위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비교법적 특징이 있다는 것이 송변호사의 설명이다.


법 자체로만 따지면 국회는 정부가 비준동의안을 제출한 후에만 심의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약 체결의 전 과정에 개입할 권한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 경제협정 내지 조약의 체결, 비준에 관한 동의권을 보장하는 법률이나 제도적 장치는 물론 조약 체결의 전 과정을 규율한 법률조차 전무하다. 결국 한-칠레 FTA 때처럼 국회는 체결 과정에서 소외된 채 마지막에 가서 ‘비준 동의냐, 거부냐’ 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된다. 사회갈등의 최상위 조정기구라는 국회의 역할이 제대로 발현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대통령 직속기구화 하자”
현재 우리나라의 통상협정 관련 법령은 2003년 말 급조돼 2004년 6월에 시행에 들어간 ‘자유무역협정체결절차규정’ (대통령훈령 121호)이 유일하다. <관련기사 27면> 하지만 이 법령에 따라 구성된 FTA 추진위원회는 외교통상부 산하에 있으며 위원장도 외교부 소속 통상교섭본부장이 맡고 있다.


전문가들은 추진기구의 위상 때문에 광범위한 의견 수렴은 물론 부처간 의견 조율도 어렵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한일 FTA 추진과정에서 산자부와 외교부, 재경부 사이의 끊임없는 신경전과 불협화음이 불거지고 있기도 하다. 현재 농업부문을 시작으로 속속 추진되고 있는 WTO 도하아젠다협상(DDA)이 본격화되면 의료, 교육, 서비스에 이르기 까지 관계없는 정부부처가 하나도 없어서 부처간 의견 조율 문제가 협상의 또 다른 관건이 될 가능성도 높다.


통상법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외교통상위원회) 이승원 정책보좌관은 “외교통상부는 협정 집행 단위이지 정책단위가 아닌데도 협상추진에 관한 모든 권한이 외교통상부로 집중되어 있다”며 “국가의 산업정책 전체에 미치는 통상협정을 다루는 기구는 대통령 직속기구로 설치하고 업계와 노사는 물론 농민, 중소기업 등 관련 이해 당사자를 모두 포괄하는 민간 자문위원회 설치를 법적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갈등 유발형 FTA
지난 한-칠레 FTA의 호된 경험 이후 정부는 관련 이해당사자의 의견 수렴 필요성을 공감하고 대통령훈령에 따라 ‘민간자문회의’를 구성했다. 하지만 구성의 내용을 보면 ‘민간’이라기보다는 ‘재계’ 일색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현재 한일 FTA 추진과 관련해 구성되어 있는 민간대책위원회는 경제 4단체의 대표와 몇몇 통상관련 학자들만이 참여하고 있다. 통상협정별로 이해관계가 상이한 업종대표나 노동계, 농어민 대표, 시민사회와 지역, 중소기업 등은 논의에 참여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와는 달리 세계 각 나라에서는 통상협정 체결에 관련 이해 당사자의 참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통상협정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1994년 무역법을 제정, 각종 통상협정에 민간자문기구의 참여를 제도화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 소속의 민간자문기구는 700여명의 자문위원과 26개 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자문위원은 의회와 업종협회, 노동계, 기업, 소비자단체, 지역 대표 등 다양한 그룹에 속해 있다.


한신대학교 국제경제학과 이해영 교수는 “정부가 경제 4단체 중심의 형식적 자문기구를 가지고 국민 참여를 운운하는 것은 국민을 홍보와 이해 제고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이해 당사자를 철저히 배제한 채 진행되는 현 정부의 FTA 추진 과정은 사회통합을 오히려 저해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갈등 유발형 FTA”라고 비판했다.


정부도 이런 비판을 의식해 통상협정 추진 관련 법령 재정비에 나설 계획이지만 여전히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의 법제화 시도가 현재의 FTA 체결절차규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
한일 FTA 등 국가 기반 산업에 큰 피해가 예상되는 통상협정의 시각이 속속 다가오는 가운데, 또 다른 ‘갈등비용’을 치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상관련법의 재정비를 통한 이해당사간 의견 수렴과 조율 절차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