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고 묻지 못하는 한국의 직장인
‘왜’라고 묻지 못하는 한국의 직장인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8.11.13 00:21
  • 수정 2018.11.13 0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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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의, 기업 업무방식 실태조사 보고서 펴내

[리포트] 한국기업의 업무방식

“알아서 해와 봐.” 부서 임원이 프로젝트를 맡기며 내린 지시다. 담당 팀은 비상이 걸렸다. 첫 보고에서 임원은 “답답하네, 그렇게 의중을 모르나”라며 다그쳤다. 두 번째 보고에선 “시킨 것만 하냐”는 질책을 들었다. 프로젝트 결과를 보면서 CEO가 내뱉은 첫 마디는 “이게 뭐야?”였다. 팀은 다시 야근을 시작했다.

비효율적 업무방식, 일의 보람도 저해

어쩐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며 쓴웃음을 지은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국내 기업들의 비효율적인 업무방식을 꼬집은 웃지 못할 사례다.

대한상공회의소(회장 박용만)는 지난 10일 ‘국내기업의 업무방식 실태 보고서’를 발표했다. 상장사 직장인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업무방식의 실태를 조사한 한편, 직장인 및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그 원인과 해법도 도출하려고 시도했다.

결과를 요약하자면 업무과정 전반에 걸친 비합리와 비효율이 문제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영향으로 직장인들 개인의 워라밸은 무너지고 있다. 일에 대한 보람도 사라지고 있으며, 수동적인 업무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직 내 구성원들이 느끼는 세대갈등은 안 그래도 커져 있는데, 업무만족도 격차로 인해 더욱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Top Down 방식으로 지시, 명령이 하달될 뿐이어서 Bottom-up 혁신은 요원할 따름이다.

직장인들과 전문가들은 ‘왜’라고 되물을 수 없고, ‘아니다’라고 의견개진할 수 없는 수직적인 소통 관행을 우선 문제제기하고 있다. 또한 리더가 아닌 매니저에 머무르고 있는 구시대적 리더십을 문제 삼기도 한다.

결국 이와 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구성원들의 인식 전환과 함께, 열린 소통의 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상사는 합리적으로 지시하며 부하직원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는 변화를 훈련해야 하며, 부하직원은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의견개진을 하는 태도를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회사에서 주어지는 일과 관련해 업무방향성은 100점 만점에 29.6점으로 대단히 취약하다고 직장인들이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적, 방향성 없는 주먹구구식 추진은 결국 전략적 판단이 부재하다는 것을 말한다.

도대체 어떤 일을 왜 해야 하는 건지 설명 없이 불명확한 업무지시를 내리고 있는 현실에 대해선 39.2점으로 역시 박한 평가고, 자율성 없이 관행에 얽매인 업무진행에 있어서도 36.8점으로 역시 점수가 낮다. 결국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해 열심히 했지만 노력대비 미약한 업무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게 직장인들의 인식인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한 직장인은 “보고가 끝나면 직원들끼리 우스갯말로 ‘오늘도 이 산이 아니었다’는 말을 종종한다”며 “왜 미리 제대로 협의할 수는 없는지 답답하다”고 토로한다. 또 “지시 내용이 불분명한 경우 다음 보고의 목적은 상사의 의중파악이 된다”며 “깨지더라도 방향만 잡을 수 있다면 성과를 거둔 것”이라는 토로에선 쓴웃음이 나온다.

(일하기) 싫어증과 자아도취의 간극

이와 같은 업무방식은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100점을 만점으로 보았을 때 직장인들이 느끼고 있는 워라밸 수준은 57.5점이다. 직장인들은 “삶의 여유를 갖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일의 재미도 못 느낀 채로 월급만 기다리며 영혼 없이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직장인들이 느끼는 부조리함은 ‘사축(社畜)’이란 비아냥거림을 만들어낸다.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시키는 것만 수동적으로 하는 직장생활, 그것도 장시간노동이 만연한 직장생활에서 보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직장인들은 자신이 회사의 소모품 중 하나라고 인식하며, 욕먹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하자는 분위기도 팽배해 있다.

또 하나 최근 들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은 앞서 언급되었던 업무합리성, 자율성, 동기부여와 같은 항목에서 뚜렷하게 세대 간 차이가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조직의 현실 상태에 대해 사원직급의 젊은 직원들은 바닥 수준의 인식을 토로하고 있는 데 반해, 임원직급이나 상급자들은 자아도취 수준의 높은 점수를 보인다.

이심전심은 없다...리더의 자질은?

소통문화를 강조하지 않는 조직이 없지만, 실제로 소통이 잘 되는 조직을 찾아보는 건 쉽지 않다. 이 역시 직장 내 상·하 직급 간 동상이몽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직장상사들이(67.6%) 토로하길, 부하직원들이 가져온 결과물이 지시한 것이나 피드백 한 내용과 달라 당황했다고 말한다. 일의 목적과 추진배경을 충분히 설명했으며, 추진방향과 예상결과물에 대해서도 충분히 협의했고, 업무지시나 피드백의 내용도 명확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상급자들의 ‘착각(?)’과 달리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결과는 여전히 우리 기업의 조직문화는 이심전심을 바라는 고맥락 소통문화임을 보여준다. 소통 상황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는 고맥락과 저맥락 메시지가 존재한다. 저맥락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대부분의 정보가 외재화된 언어 코드에 실려 있다. 즉, 주의 깊게 듣는 것으로 메시지의 전달이 충분하다.

이와 반대로 고맥락 커뮤니케이션은 많은 정보가 신체적인 맥락(제스처, 눈빛, 목소리 톤 등)에 있거나 개인에 내제돼 있는 반면, 밖으로 드러나 있는 정보는 적고, 있더라도 코드화돼 있다. 고맥락 의사소통에 익숙해 있는 이들은 듣는 이가 자신의 고민을 이미 알고 있어서 마음 속 내용을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기대한다. 따라서 말하는 이는 핵심을 빙빙 돌며 표현하고, 이 핵심의 빈 자리를 채우는 일은 듣는 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전히 수직적이고 고압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상급자에게 질문이나 이의제기를 하는 게 눈치가 보인다는 결과도 찾아볼 수 있다. ‘업무’ 중심이 아닌 여전히 ‘관계’ 중심의 업무체계 속에서 성과를 찾아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리더들은 전략적 판단 하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니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에 치중하게 된다. 리더 스스로가 성공에 대한 확신이 불분명하니 책임에서 발을 빼려는 모습에 가깝다. 또한 부하직원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는 대상으로 보면서, 결국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직원들의 주인의식이나 자기노력의 필요성을 저해하는 것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또 그에 반해 과도하게 자기 확신에 빠진 리더의 모습 역시 조직 내 소통의 저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다. 리더의 성향은 정반대지만 두 사례 모두 리더십의 롤모델을 접해볼 수 없었던, 리더들 스스로의 한계일지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리더 스스로가 과거 상사들에게 지시, 통제형 매니저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란 의미다.

변화는 무엇에서 출발하나?

전문가들은 우리 기업에 만연한 이와 같은 분위기를 우선 인식의 전환으로 바꾸길 시도하고, 구체적인 행동변화에 대해 훈련해야 하며, 실제로 변화된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인식의 전환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상사는 설명하는 것이고, 부하는 질문하는 것이다. 답을 주지 못하는 상사에게 묻는 것은 불경한 일이고, 답을 못 맞추는 직원은 무능력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하루아침에 변화되진 않을 것이다. 상사는 합리적으로 지시하고 경청하는 훈련을, 부하직원은 적극적으로 의견개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인터뷰에 응한 직장인들은 “대개 상사들이 업무지시나 피드백 훈련을 받지 못해서, 지적과 피드백을 구분하지 못하다보니 ‘욱, 디스, 썩소’ 중 하나는 필수동반”이라고 말한다. 또 리더십 교육을 받고난 이후에는 “일단 끝까지 듣고는 있지만 온몸에서 ‘아~ 됐고~’라는 생각이 느껴진다”라고 생생하게 전한다.

그런가하면 작금의 현실과 상황에 대해 뼈저린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인터뷰에 응한 한 임원은 “시킨대로 하는 게 사실 편하다. 윗사람도 기분 나쁠 일 없고 아랫사람도 책임부담 없으니 둘 다 암묵적인 합의를 해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기업에서 이를 바꿔보고자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임원이나 상급자의 방을 없앤다든지, 호칭을 일원화한다는 등을 시도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대증적 요법은 한국과 같은 문화권에서는 일정 한계가 있으며, 리더의 ‘권위 깨기’보다 ‘정보독식 깨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문가들의 이와 같은 제언은 인터뷰에 참여한 직장인들의 목소리에서도 확인되는데, 한 직장인은 “열린소통 하라고 하면 CEO와의 식사 같은 이벤트만 기획하는데, 진짜 소통은 경영현황과 주요 이슈가 수시로 투명하게 알려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