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통상협정 국민 참여 보장은 왜 물 건너갔나
비하인드 스토리-통상협정 국민 참여 보장은 왜 물 건너갔나
  • 참여와혁신
  • 승인 2005.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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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이 ‘억지 춘향’격으로 국회를 통과한 지난 2003년 12월. 정부는 서둘러 FTA 추진 관련 법령 마련에 들어갔다.
당시 안호영 외교통상부 다자통상국장은 비준동의안 표결 뒤 3일 만에 “한-칠레 FTA 추진 과정에 발생한 문제점을 보완해 투명하고 효율적인 FTA 추진을 위해 관련 절차를 법제화하는 실무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후 외교통상부는 FTA 대상국 선정 과정에서 공청회를 통한 여론수렴, 타당성 조사, 협상 과정 공개, 관련 업계 의견반영 등을 주요 내용으로 이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결과 탄생한 것이 현재 자유무역협정 체결과 관련해서 국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법적 장치인 ‘자유무역협정체결 절차규정’이다.


그러나 규정은 당초 법령 마련의 취지였던 ‘여론수렴과 관련 이해 당사자의 의견 반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는 전혀 부합하지 못한 채, 협상 추진의 절차와 기구만을 명시하는 데 그쳤다.
이 규정은 공식적 법령이 아니라 대통령 훈령으로 급조되어 2004년 6월 8일 발령과 동시에 시행에 들어갔다. 훈령은 단순한 행정명령일 뿐, 원칙적으로 법규와 같은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의견수렴 및 투명성·효율성 마련을 위한 법제화’라는 애초의 취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당시 관련 법 제정을 위해 외교통상부가 구성한 전문가 자문단에 속해있던 한 인사는 애초부터 정부의 의도가 다른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한-칠레 FTA 체결 비준동의 과정에서 국회도 정부도 별 역할을 하지 못했죠. 정부가 홍역을 치르자마자 서둘러 법제정에 나선 데에는 비준 과정에서 정부의 권한을 좀더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당시 자문을 맡았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권한 강화보다는 갈등 조정의 최상위 기구인 국회의 역할에 더 비중을 두고, 경제나 학계뿐 아니라, 농민단체와 노동계, 시민사회단체 등 직접적 이해 당사자의 의견 수렴 과정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고 이 인사는 전했다.


결국 몇 차례의 공개 세미나와 전문가 검토를 거치는 과정에서 애초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하자 서둘러 대통령 훈령으로 FTA 체결 절차만 명문화하는 형식적 제정에 그쳤다는 것.


고려대학교 법학대 박노형(통상법) 교수는 “통상 협상에는 반드시 피해 집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현재 존재하는 형식적 훈령은 통상 정책의 조율 체계를 정비하고 부처간 이견을 조율할 리더십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훈령이 법령보다 위상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FTA의 중요성을 감안해 대통령훈령으로 절차를 규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칠레 FTA로 인해 ‘비싼 수업료’를 치른 정부가 여전히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