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노동자는 돈만 필요하다?
2004년 여름, 노동자는 돈만 필요하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07.10 00:00
  • 수정 2020.06.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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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불안 현실 속 더더욱 임금에만 매달려
신바람 사라진 일터 ‘작업장 혁신’만이 희망

coverstory
노동자를 말한다

 

■ 노동만족도 조사
■ 이것이 현실이다 임단협 즈음 그대, 무엇을 꿈꾸는가 / 술잔은 비었는데 뭘로 채우나 / 말말말
■ 생생 현장 방담 대기업 노동자는 말한다



“돈이 있으면 사업을 하고 싶죠. 구체적인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조카가 요리사 자격증이 있거든요. 그래서 같이 식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죠. 돈이 문제예요. 그러니까 장사 밑천이라도 마련할 때까지는 회사에 계속 다니는 수밖에요.”
서른아홉, 수도권 지역의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입사 11년차 김씨는 장사를 하고 싶단다. 아내가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본인의 수입이 전부인 김씨로서는 커가는 아이 둘 밑으로 들어갈 교육비와, 전세 아파트 신세에서 벗어나 내 집이라도 장만하려면 ‘노동자’ 생활로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지난해 ‘귀족 노동자’ 논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고임금에 속한다는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얘기로는 의외다. 여기에 대해 김씨는 답한다.
“주말이 거의 없어요. 토요일 야근 끝내고 일요일 아침에 퇴근하면 하루 종일 잠에 빠져 들죠. 잔업이나 특근 안 하면 되는데, 우리는 자기가 한 만큼 가져가는 거예요. 월급이 아니라 시급이니까 잔업·특근 안 하면 가져가는 돈이 정말 적어져요. 저야 아직 젊지만 같이 일하는 형님들은 몸이 성한 데가 없을 지경입니다.”

 

 

IMF와 대기업의 부도, 이로 인한 정리해고 등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이후 심리적 고용불안감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고용안정 협약서 보다는 있는 동안만이라도 돈을 많이 받고 싶단다. 희망과 소속감을 상실한 2004년 여름 대한민국의 공장은 노동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터가 아니라 단순히 임금을 받기 위한 생존의 현장일 뿐이었다.

 

 

있는 동안이라도 돈 많이 받고 싶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입사 10년차 서른세 살의 최씨는 말한다.
“집에서 애가 ‘아빠 무슨 일 해?’라고 물었을 때 노동자라고 대답하는 거 하고 과장이라고 말하는 거는 달라요. 노동자에 대해서는 아직도 사회적 인식이 달라요. 그게 현실인 것을….”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에 당당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이 당당하고 싶어도 세상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능력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불신도 팽배해 있었다.
“회사의 인사정책에 기준도 없고 능력평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질 않아요. 작년에 승급 대상이었는데 회사 정책에 대해 공감하고, 조·반장도 확실히 보조했어요. 그리고 1년 동안 결근 한 번 없이 근태도 좋고, 제안도 많이 해서 당연히 기대를 했죠. 그런데 승급에서 누락됐어요. 더 화가 나는 건 대상도 아니었던 다른 사람은 승급했다는 거예요.”
원칙은 사라져버리고 경영진과 노동조합 간의 힘겨루기, 혹은 현장 계파조직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사나 평가 문제가 달라지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능력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불신감
어느새 노동은 그 자체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서른 넷, 9년차 정씨는 말한다.
“전 인문계 출신인데도 현장에 와서 잠깐 교육 받고는 금방 할 수 있었어요. 일 자체가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순반복 작업일 뿐이죠. 그래도 예전 부서에서는 일 자체는 힘들어도 동료들하고 친해서 재미있게 일했는데, 부서가 바뀌면서는 그것도 안 돼요. 작업자들이 자기 일만 끝내면 땡입니다. 서로 대화가 거의 없어요. 글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얘기를 별로 안 하려고 그래요.”
쉰 한 살 늙은 노동자 김씨의 생각은 좀 다르다.
“노동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아요. 내 스스로가 찾아서 하는 게 문제죠.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재미가 있어야 할 수 있어요. 좀 힘든 일은 운동이다 생각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했을 때 뿌듯한 자긍심 같은 것도 느껴지죠. 물론 그렇게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일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창조적으로 일할 수 없는 분위기
노동의 종말을 얘기하는 시대에 노동의 가치를 찾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동의 가치를 되찾지 않으면 노동의 종말을 막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높은 임금을 받아서 가정생활 등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수당이라도 더 줘서 일할 의욕이 생기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얘기 속에 노동을 통한 보람은 없었다. 더 이상 회사도, 노조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지 내게 돈을 더 많이 줄 수 있는 쪽이면 그것이 ‘선’이라는 생각이 노동의 기본을 흔들고 있다.
70년대 말부터 일해 온 50대 노동자의 말처럼 “환경과 복지 등 분위기는 엄청 좋아졌”는데도 왜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
고려대 강수돌 교수는 이에 대해 “노동자가 더 이상 노동을 주체적으로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사람을 통제하는 상태로 진전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에만 매달리거나 혹은 오랜 세월동안 생계유지를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습관’이 되었다. 이렇게 노동중독이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서 확장되고 있는데도 우리는 대부분 이 사실조차 잘 인지하지 못하는 그런 시기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의 가치를 되찾자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결국은 작업장 혁신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돈이 최종목표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동기와 참여를 높여야 하는데, 여기에서 노동내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
한국노동혁신연구소 이문호 소장은 “작업자들의 노동에 대한 흥미는 직무확대와 자신의 작업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가질 때 일어난다. 직무확대와 책임과 권한이 현장으로 이양되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경쟁력 강화(효율성)와 고용안정(노동의 인간화)이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과 노동의 인간화가 일치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 개인의 의식 변화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와 사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작업장 혁신을 고민할 때 가능하다. 분배의 문제에서 생산의 문제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노동이 가치 있고, 노동이 즐거울 수 있을 때 노동의 인간화는 가능하다. 따라서 기업은 노동자가 현장에서 권한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노조는 생산성 향상이 고용안정과 이어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희망을 잃어가는 우리의 공장에서 ‘욕망의 분배’가 아니라 ‘희망의 분배’가 가능해질 것이다.


보람도 흥미도 자긍심도 없다
생산직 노동자, 노동만족도 전선 이상
우리나라 주요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의 노동만족도 및 삶의 질에 관한 만족도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해 조사한 ‘기능인력의 근로조건 및 노동과정 실태와 근로생활의 질 향상방안’에 따르면 ‘일의 의미’와 ‘일의 무의미성’에 대한 응답자들의 반응이 중간보다 낮게 나타나 다수의 생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6월 5일부터 한달 간 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섬유산업의 대표적 공장 6곳의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및 면접을 통해 이뤄졌다.
노동자들이 느끼는 일의 의미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기 위한 항목은 <일의 의미>, <일의 보람>, <일을 통한 삶의 만족>, <일의 흥미>, <일의 결과에 대한 지식> 등으로 구성됐다.

조사 결과 <일을 통한 삶의 만족>에 대한 노동자들의 평가는 모든 업종에서 중간 이하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동차와 화학·섬유 업종 노동자들이 조선 업종에 비해 더 낮은 평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일의 보람>, <일의 흥미> 부분에서도 중간보다 낮은 평가를 나타냈고 특히 자동차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일에 대한 불만이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보고서는 자동차 업종 노동자들의 불만족도가 높은 원인 중 하나로 단순 반복 작업을 꼽고 있다.

<근속기간과 직무숙달 소요기간>에 대한 조사 결과가 이러한 분석에 신빙성을 더한다. 작업 과정의 숙달에 소요되는 기간을 업종별로 비교해 보면 1주일 이내를 1로, 1년 이상을 6으로 했을 때 조선 4.93, 자동차 3.59, 화학·섬유 4.12로 나타나 자동차 업종의 숙련 소요 기간이 가장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업종 노동자들이 작업 숙달에 걸리는 기간을 보면 1주일 미만이 10.9%, 1개월 미만이 19.6%, 3개월 미만이 24.3%, 6개월 미만이 12.6%, 1년 미만이 10.4%, 1년 이상이 22.2%로 나타났다.
숙달 기간을 중심으로 볼 때 자동차 업종의 경우 과반수를 상회하는 54.8%의 노동자들이 3개월 이내에 충분히 숙달될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한 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동차 업종의 경우 노동자들이 한 직무를 오랫 동안 수행하고 장기근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수행하는 작업은 숙달 기간이 매우 짧고 별다른 지식과 숙련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한 일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삶의 질을 파악하기 위한 주요 지표로는 <삶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 <직업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 <경제적 만족도>, <노동자로서의 자부심> 등 항목이 제시됐다.

조사의 결과를 보여 주는 아래 표에 따르면 조선 업종을 제외한 자동차와 화학·섬유 업종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 직업에 대한 만족도,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은 중앙값에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조선 업종 노동자들은 수입에 대한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 형태별로 살펴보면 직영 정규직이 삶에 대한 만족도, 직업에 대한 만족도, 수입에 대한 만족도, 노동자로서의 자부심 등 모든 항목에서 하청 근로자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은 노동자들의 계층 귀속 의식에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조사에 응한 생산직 노동자들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한국사회에서 중·하층, 혹은 하층에 속한다고 응답하였다. 조선 업종 응답자의 86.5%가 자신을 중·하층, 혹은 하층에 속한다고 응답하였고, 자동차의 82.8%, 화학 섬유 업종의 88.8%가 자신을 중·하층 혹은 하층에 속한다고 응답하여 노동자들의 하층 귀속 의식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우리 사회의 하층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상황은 그 만큼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갖는 자긍심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조사의 책임 연구를 맡은 직업능력개발원 장홍근 박사는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느끼는 자괴심은 작업장 전반에 걸쳐 구조화된 고질적 문제”라며 “제조업 기능직종 취업을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발전 전망을 제시하고 작업 환경 개선, 고용불안감 해소 등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