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만들어 갈 봉제노동자 권리
한 땀 한 땀, 만들어 갈 봉제노동자 권리
  • 강은영 기자
  • 승인 2019.01.11 11:49
  • 수정 2019.01.11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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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노동자들, 하나로 뭉쳐야

[리포트] 서울봉제인노동조합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봉제노동자였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라고 외치며 불길에 휩싸인 후,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0년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청계피복노조가 설립된 지 48년이 지난 11월 27일, 화섬식품노조는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서울봉제인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이하 지회)을 설립했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봉제 노동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서울 봉제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초대 임원으로 선출된 이정기 서울봉제인지회장과 곽미순 부지회장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까.

이정기 봉제인지회장과 곽미순 부지회장
이정기 봉제인지회장과 곽미순 부지회장

서울 곳곳에서 일하는 봉제노동자

서울 시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봉제 사업장이 존재한다. 5명 정도가 소규모로 일하는 사업장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공장에는 20대의 미싱과 함께 30~40명 정도 노동자가 있는 곳이 허다했다.

IMF의 여파가 봉제 산업에도 타격을 입히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공장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하고,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지금의 서울에는 작은 공장들만 남게 됐다.

최근 주52시간 근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있지만, 봉제노동자들에게 8시간 근무는 꿈같은 이야기다. 일감이 쏟아질 때 하루 16시간을 꼬박 앉아 일을 해야 한다. 제 시간 안에 일을 마치려면 주90시간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감이 떨어질 때는 하루 종일 미싱을 돌리지 못 할 때도 있다.

옷은 사시사철 소비되지만, 봉제노동에는 비수기와 성수기가 존재한다. 저마다 전문으로 제작하는 옷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정기 서울봉제인지회장은 겨울에 소비되는 남성코트를 주로 제작한다. 반면 여름에 주로 소비되는 남방셔츠만을 제작하는 곳도 있다.

계절이 시작되기 전 옷을 만들기 때문에 성수기가 지나면 일감이 뚝 떨어진다. 이 지회장은 옷의 수요가 활발한 시기는 봄, 가을이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옷이 만들어지는데, 최근에는 봄,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다 보니 봉제노동자들의 비수기가 길어졌다”고 한탄했다.

곽미순 부지회장은 해마다 상황이 안 좋았지만 올해는 그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봉제노동자들의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낮은 단가라고 지적했다. 공장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보니 업체들이 단가가 싼 곳만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가격 경쟁으로 인해 단가가 자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지회장은 “한국은 인건비가 비싼 반면 해외공장은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같은 옷을 생산한다고 할 때 외국으로 물량이 많이 넘어가 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현재 봉제노동을 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50대 중·후반의 30년 이상 경력자들이다. 이들은 초등학교 졸업 후 생계를 위해 미싱을 시작했다. 문제는 뒤를 이을 후배들이 없다는 점이다. 이 지회장은 요즘에 ‘시다’라는 직업이 없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다는 봉제 일에 막 들어와 일을 배우는 단계다. 오랜 시간 앉아서 고된 노동을 해야 하고 임금도 넉넉지 않아 관심을 가지고 봉제업에 뛰어들었던 젊은 세대들은 버티지 못 하고 뛰쳐나가는 현실이다.

공제회, 봉제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을 힘

지난 11월 27일 저녁, 서울시일자리지원카페에서 서울봉제인지회 설립 총회가 열렸다. 2017년 3월, 9만 봉제노동자들의 노동권익 향상을 위한 사업단을 꾸린 지 2년여 만이다. 이날 이정기 봉제노동자가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지회장은 먼저 조직을 안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동조합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노동조합에 대해 잘 알지 못 하는 노동자들이 많아 홍보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지회는 아직 조합원 가입 절차를 준비 중이다. 본격적인 조직화 활동에 앞서 봉제노동자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를 계획했다. 16문항으로 구성된 설문지에는 현재 수입과 질병의 유무, 개인 보험 가입 여부 등이 포함됐다. 1월 한 달간 1,000명의 봉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예정이다.

봉제노동자는 대부분 4대 보험도 가입 못 해 제대로 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고안해 낸 것이 ‘공제회’다. 서울 시내 곳곳에 퍼져 있는 봉제 노동자들을 하나로 뭉치기 위한 방법으로도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했다. 퇴직을 하거나 반실업 상태를 겪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공제회를 통해 생활비를 지원해주거나 의료지원 등 다양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지회장은 노조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고 밝혔다. “이전에 청계피복노조가 존재했지만 이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오랜 시간 사회적 혜택이나 법적인 보장을 받아본 적 없이 혼자서 일을 해 왔다”며 “자신들의 몸이 힘들어도 고된 노동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이다보니 무엇인가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회가 그동안 갇혀 있던 봉제노동자들의 인식을 깨고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적극 알려야 한다는 과제도 주어진 것이다.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 중 하나는 단체교섭권이다. 10인 미만 사업장이 대부분인 이곳에는 사업주도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지회는 10인 미만 사업장 중 직접 노동을 하는 사업주까지도 노조에 가입할 자격을 줬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지회가 교섭해야 할 대상을 찾는 것도 문제다.

서울 시내에 봉제와 관련된 단체들은 무수히 많지만, 미싱사나 시다들이 모인 단체를 찾기 어렵다. 봉제 관련 단체들이 대부분 동네 사업주들이 모여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지회장은 “사업주들은 노조가 자신들의 이익을 앗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들의 사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며 “교섭권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필요한 단체들이 모여서 협의를 할 수 있는 협의체를 만드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봉제노동자에게 따뜻한 관심을

서울시의 봉제노동자 수는 약 9만 명. 이는 전국 의류제조업 종사자의 63% 정도로, 절반 이상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봉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5인 미만 사업장의 소상공인을 위한 정책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지회장은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은 잘 되고 있지만, 정작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며 “소상공인 100명이라고 하면 그 밑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300~400명이 되는데 이들을 위한 지원은 왜 논의되지 않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 지회장과 곽 부지회장은 서울봉제인지회 초대 임원을 맡게 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 이 지회장은 “임기는 2022년 12월까지 3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하지만, 조직이 안정화되고 봉제노동자들을 위한 사업을 이어간다면 조직화도 탄력 받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곽 부지회장은 “서울시내에는 봉제뿐 아니라 제화나 세공업 같은 제조업이 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 뭉쳐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며 “지회를 위해 서울시부터 시작해 노동권익센터, 청계피복노조 선배들도 응원을 보내주고 있어 이제는 우리들이 열심히 활동하면서 노조를 알려야 할 것 같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년 5월경 공제회가 출범할 예정이다. 이 지회장은 “공제회를 위해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봉제노동자들의 현안을 파악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복지를 제공할 것”이라며 “주위에서 도와주는 손이 많은 만큼 현장에 이 열기와 분위기를 전파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봉제노동자들의 권리 찾기를 시작하면서 이 지회장이 바라는 봉제노동자의 삶은 무엇일까. 그는 “그저 안정적인 일과 수입, 노후를 바랄 뿐”이라며 “꿈꾸는 환경을 만들기 쉽지 않겠지만 반드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곽 부회장은 “봉제에 관심 있고 배우고 싶어 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열악한 환경 때문에 버티지 못 하고 떠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 젊은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고 시간이 지나 그들이 우리 나이가 됐을 때 좋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이 지회장은 마지막으로 “서울시내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봉제 일을 하고 있다”며 “길거리를 지나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곳을 한 번이라도 쳐다보고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봉제노동자들이 소외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며 “누구든 옷을 입는 것이 당연한데, 그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고 서울봉제인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