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가 창의성을 만든다
참여가 창의성을 만든다
  • 김란영 기자, 박종훈 기자
  • 승인 2019.01.11 11:50
  • 수정 2019.01.11 1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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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립하는 과학기술정책 거버넌스 재편 필요

[커버스토리] 국가 R&D의 미래 ② 현장 연구자들의 목소리

한국사회는 선택과 집중으로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산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했다. 과학기술은 주력산업 성장과 국가경쟁력 향상의 원천이었다. 그 결과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과학기술의 국제경쟁력은 세계 10위권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철강 등 경쟁력 있는 한국산 품목 역시 과학기술을 근간에 두고 있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겪으면서도 정부와 민간의 연구개발(R&D) 투자는 지속적으로 늘었다. 2016년 기준, 민간과 정부의 총 R&D 투자는 69.5조 원으로 미국,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5위 수준이다. GDP 대비 총 R&D 비용은 세계 2위 수준이다. 정부 차원의 R&D 투자 역시 최근 10년 사이 연 평균 약 6.5%씩 증가했다.

막대한 투자 규모만큼의 제대로 된 성과를 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현장에선 말 그대로 연구와 개발에 몰두할 수 없는 풍토라고 말한다. 정부도 이와 같이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낡은 R&D 지원체계 ▲부족한 혁신역량 ▲느슨한 성과확산 체계 등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단순히 과학기술계의 담론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와도 직결된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 나가야 좋을까?

현장 연구자들이 토로하는 한국의 R&D 정책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나라했다. 장시간에 걸쳐 다양한 방향에서 현재 연구 현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해 보았다. 연구자들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고 있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오고 있음에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도 엿볼 수 있었다. (좌담은 2018년 12월 17일에 진행됐으며 사회는 <참여와혁신> 박송호 발행인이, 좌담 정리는 김란영 기자가 맡았다.)

왼쪽부터 최연택, 최숙, 이성우, 오현우, 장영비
왼쪽부터 최연택, 최숙, 이성우, 오현우, 장영배

 

참여와혁신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도 못 받고 있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성장을 이루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오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나라가 과학 분야에 투입하는 예산이 GDP 대비 세계 2위더라. 전체 비용으로는 세계 5위정도.

언론에선 기초과학을 봐야 한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조금 아쉬운 건 남의 이야기이지 당사자의 목소리로 현장에서 왜 기초과학이 안 되는지, 왜 혁신적인 연구들이 안 나오는지, 왜 국민 친화적인 과학으로 우리 생활에 다가오지 못하는지 얘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행히 최근 정부가 과학정책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과 방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관료, 기관 운영자 중심의 정책적 접근을 하고 있어서, 현장의 이해당자들과의 소통, 참여에 기반한 정책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여러 가지 층위에서 현장에서 진단하는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성우 공공연구노조 위원장(한국생명공학연구원)

우선 현 정부가 내세운 정책 전반을 한 번 살펴보는 게 어떨까?

지금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몇 가지 중 하나가 (가칭)국가연구개발특별법을 만들어서 무차별로 흩어져 있는 규정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 아직 발의도 안 됐다.

또 하나는 부처별로 난립하고 있는 연구관리 전문기관을 한 부처, 한 기관으로 통합해 정리하겠다는 것. 이것도 이제 계획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 정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발표해 놓으면 국민들은 다 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도 진척이 없다.

11월 29일에 초청 토론회 가서 정부가 발표한 것을 들어도 2019년 이후로 계획돼 있더라. 그럼 2019년에 발의하고 하면 벌써 집권 3년 차다. 이 정부에서 과연 제대로 진도가 나갈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최연택 공공연구노조 정책위원장 (국가수리과학연구소)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자료를 조금 찾아보니까 옛날에 나온 것들이 좀 있었다. 기본적으로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 등등 나름대로 혁신방안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결국 추진할 인사와 현장과의 박자가 맞아야 하는것이다. 문 정부가 나름대로 이전 정부에 비해 괜찮은 방안들을 내놓고 계속 추진할 의사가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현장과 소통이 잘 안되는 게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이번 국감에서도 나왔지만, 현재 과학기술 쪽 가장 큰 이슈는 PBS 문제 아닌가. 1996년에 기존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면서 지금 한 23~24년 지나니까 많은 것들이 변화되고 고착화된 병폐들이 들어나고 있다.

최근에 PBS를 폐지하자고 계속 요구해왔고 또 여당이나 현 정부에서도 폐지 방침으로 갔다가 사실 지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아닌가 싶다. 정부가 PBS와 관련해 두 차례 설명회를 가지고 지난주에 최종 설명회 비슷한 걸 했는데, 그 안을 보면 프로젝트 중심에서 프로그램 중심으로 변환한다는 내용이 있다. 변화는 있는 것 같은데 근본적인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성우 공공연구노조 위원장
이성우 공공연구노조 위원장

 

이성우

이번 정부에서 과학기술 관련된 과제 중 핵심은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자문기관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심의기관으로 격상해서, 20조 원에 대해 심의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는 것 하나가 있고, 과기부에 3차 관 혁신본부를 신설해서 3차관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거버넌스 그림을 만드는 일이 있다.

실질적인 각론에 있어서는 R&D 테마가 없는 정부부처가 없다. 예산이 쭉 커지다보니까, 보건복지부, 환경부, 국토부 할 것 없이 모두 R&D가 생겼다. 중요한 건, 각 부처별로 R&D가 생기면서 그 칼자루를 관료들이 쥐게 됐다는 데 있다. 이게 PBS와도 연동이 된다. 관료들이 주가 돼서 R&D 사업을 만들고 예산을 확보해왔다. 그러다보니 사업에 대한 재량권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전까지는 연구자들이 연구비를 어떻게 집행할지 고민하고 집행할 수 있는 재량권이 상당히 컸다. 그런데 지금은 연구자들에게 그 재량권이 거의 없다.

이러한 문제가 지난 40년 동안 불거지다 보니 이번 정부가 하겠다는 것이 20조 원에 대한 거버넌스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앞으로 심의가 제대로 되려면 연구관리특별법을 만들어줘야 한다. 부처에서 하는 R&D 사업들은 각 부처의 고유한 법률이 적용되고 있다. 이게 너무 난립하니 2000년, 2001년에 기본법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는데 반대가 심해서 추진하지 못하고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물이라도 통합해서 관리해보자고 해서 NTIS(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같은 게 만들어진 거다. NTIS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구축한 사업, 과제, 인력, 연구시설·장비, 성과 등 국가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정보를 한 곳에서 서비스하는 국가과학기술 지식정보 포털이다.

법을 만들어서 100여 개가 넘는 관리규정을 하나로 체계화하고 일원화하자는 게 특별법의 개념이고, 부처 전문기관별 관리시스템을 통합해서 하나로 만들자는 게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계획이다.

참여와혁신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다녀보면 어떤 문제가 있냐면,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게 우리 사회의 트렌드인데, 이 공공성이 공무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더라.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다양성이나 자율성, 창의성을 넓혀가야 한다고 하는데, 단일한 규정을 요구했을 때 다시 주어진 틀에 맞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현실적인 딜레마가 있는 것 같다.

최숙 기초과학연구원 이학박사

말씀하신 것처럼 독창성이나 이런 부분들이 최근 트렌드다. 한국은 투자 금액에 비해 결국 얻는 효과가 굉장히 미미한 상태다.

결국 창의성은 사람한테 나온다. 어떤 사람들한테 나오는 거냐, 기존에 있는 나이 드신 연구자들, 선배 연구자들은 이미 연배가 많고 과거에 했던 연구를 답습하셨던 분들이다. 이제는 시대와 사회가 변했기 때문에 결국은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창의성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사람을 통해 모든 문제들이 제기되기 때문에 연구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현장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불합리성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세력화도 안 되고, 의견 전달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책에도 반영이 안 된다.

그러면 지금 왜 현장의 젊은 연구자들이 이야기를 못하느냐, 왜 이렇게 목소리가 작을까 원인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기초과학연구원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중점적으로 기초과학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노벨상을 만들어내겠다고 설립된 국내 최초의 기관이다. 예산을 굉장히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연구원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보면 젊은 연구자들은 욕심이 별로 없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월급을 받고 연구할 수 있는 주제가 주어지면, 정말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연구만 하는 분들이다. 그러다보니 본인의 처우가 어떻게 되는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건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기사를 보니까 서울대에도 포닥으로 올 사람이 없어서 연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기사들 많이 보셨을 거다. 젊은 과학기술인들이 줄어들고 있다. 똑똑한 연구자들이 해외로 나가서 안 들어오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기초과학연구원과 카이스트 등 우수연구기관, 유수의 학교 시스템을 보면 과학기술인들 처우가 굉장히 낮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연구나 관련 통계치가 없다. 왜냐면 우리 사회는 스타 과학자만 보기 때문이다.

IBS에 있는 스타 과학자들, 단장급으로 오시는 분들은 연봉이 2억 원, 3억 원으로 처우가 좋다. 그런데 일반 연구자들에게는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지원을 해준다.

연구자들은 10년이든 20년이든 그 분야에 몰입해서 연구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일념 하나 밖에 없다. 그런데 연구자들이 연구소에 와서 3년, 5년을 일하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연구를 할 수 없는 실태이고 처우가 굉장히 낮아서 자리에 계속 있으면 가정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노벨상을 탄 3편의 중요 논문을 다 썼다. 그 논문들 모두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일할 때 나왔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지금 당장 직업을 구해야하고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면 노벨상을 탔던, 그 훌륭한 연구결과를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 부분이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시스템이나 제도 개선을 아무리 많이 해도 연구자들은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오현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오현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오현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그 부분에서 우리가 조금 혼돈할 수 있는데 보완을 했으면 좋겠다. 젊은 연구자를 키우고 활동할 영역을 넓혀주자는 것이 잘못되면 늙은 연구자의 무용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자들은 보통 연구를 20~30년 내다봐야 한다고 한다. 젊은 연구자들이 굉장히 머리가 좋아서 처음에는 샤프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보통 첫 번째 연구에서 본인의 큰 꿈을 품고 가닥을 내보인다. 그 다음에 나머지 10년, 20년은 그것에 대한 증빙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면, ‘이 이론이 정말 맞을까?’, 다른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하면 ‘왜 저 사람들은 안 된다고 하지? 내가 생각하기엔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20~30년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은 뒤에야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연구자들이 나이가 들어 문제라기보다는 연구자들이 젊었을 때 가졌던 창의적인 생각을 계속 증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에는 ‘어, 너 굉장한 걸 발표했네? 좋아. 그 다음에는 너 뭐하지?’ 라는 식이다. 산업화도 마찬가지다. 좋은 연구를 발표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다음에 지원을 더 이상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했는데 더 이상 뭘 하겠다는 것이냐는 논리를 펼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뒤에 수많은 검증과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보완하고 완성도를 이루는데 더 많은 시간이 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거다. 결국 연구자들이 젊었을 때 창의적인 생각이나 좋은 원천 기술을 발견해놓고도 그 후속 연구를 못하니까 사장되어버리는 거다.

산업 쪽에서 연구자의 연구를 실용화해봤으면 좋겠다는 후속 연구 지원을 해주면 좋다. 하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은 당장 돈이 되는 걸 원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은 연구 개발에 투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연구자들은 연구자들대로 위축되고 산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연구자들의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개발된 것을 사오는데 급급한 거다.

젊은 과학자들이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것들 중에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은 계속 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 여기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PBS다.

PBS 자체가 연구자들이 창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PBS는 연구자가 여러 과제를 수행해서 생존을 하게끔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다. PBS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과제를 수행해야 하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돈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연구자가 어떤 연구를 해도, 하고 싶은 연구를 꾸준히 할 수 없다.

또 한 가지가 PBS는 연구자들이 관료들의 마음에 드는 게 필요하다. 관료들은 선무당처럼 어설픈 전문가다. 관료들은 벌써 국제사회에 나가서 아는 단어들이 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어떤 연구 제안을 했을 때 ‘어? 이미 이건 들어봤는데. 그거 지금 해서 뭐하게?’ 이런 식이다. 결국 연구자들은 관료들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제안해야 한다. 새로운 걸 제안해야 한다는 말은 연구자가 기존에 자기가 해오고 있었던 연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연구자들의 전문성이 자꾸 떨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관료들 입맛에 맞추기 위해 자기도 잘 해보지 않은 생소한 연구들을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고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젊은 과학자가 필요한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래서 공무원 중에 박사학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싫다. 관료들의 어설픈 지식. 정말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내용은 다 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겪는 치열한 어려움은 모른다.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나도 실험해봤는데, 나도 연구해봤는데, 하면 되지 뭐’ 이런 식이다.

장영배 공공연구노조 정책위원
장영배 공공연구노조 정책위원

장영배 공공연구노조 정책위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관료들, 특히 정책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고위 관료들일수록 자기가 공익을 대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주요 정책 결정에서 드러나듯 관료들이 결코 우리나라 공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관료 사회에서 이해관계가 있고 또 굉장히 중요한 사회경제 정책에서 노동자 대중이나 서민이 아니라 대기업이나 재벌, 부유층 위주로 정책을 집행해왔다. 산업화 당시의 멘탈리티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관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그런 식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동안 소외됐던 부분에 대한 균형 잡기나 정상화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일이 터지면 립 서비스 하고, 후속조치는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을 기대한다. 사람들도 기대대로 잊어버려 준다.

말씀하신대로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만큼 국민들의 삶이나 환경을 개선하는데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려면 국민들이 의사 결정 초기단계부터 참여해야 한다.

공공기관 연구비 재원은 결국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국민들은 발언권을 가져야 하고 연구 성과로 나온 제품이나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과학기술계는 ‘전문가주의’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개입하지 말라는 거다. 원자력 마피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원자력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원자력에 대해서 찬반을 이야기 하느냐. 연구기관의 과학기술자들은 이런 문제를 인식을 해야 한다.

연구자들은 연구가 함의하고 있는 사회적인 의미나 여파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요즘 국가 경쟁력, 경제성장을 목표로 한 연구 개발 활동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연구개발 활동(RRI)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자나 과학자들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낮다. 소위 우리나라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그런 의식이 낮듯이 과학기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전문가로서 학위 가지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비전문가들이 왜 가타부타 말하느냐. 이런 의식들이 아직도 강하다.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부터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주요 정책결정기구나 의사결정기구에 이런 목소리를 어떻게 담아낼 것이냐.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기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장 전문가가 의사결정 초기 단계나 최고 단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정부가 정책을 다 결정하고 집행될 때 의견을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을 밝히면 이미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라서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식이다. 연구회에서 결정됐으니까 우리 실무자들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연구회니 이사회 등 의사결정기구나 자문기구에 현장 연구자 대표자가 들어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취임 때 얘기했듯이 노동이사제도 확립돼야 한다. 그 다음엔 연구결과에 영향을 받는 일반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국민들의 의제도 연구에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관료가 모두 지배하고 있다. 연구회만 보더라도 과반수이상이 차관급 정부 관료들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사학연이 추천을 하면 국무총리나 대통령이 임명을 한다. 결국 관료들이 100% 하는 거다.

그러다보니까 연구회에서 어처구니가 없는 지침이 내려올 때가 있다. 임금피크제를 해라. 퇴물 관료들을 자문 관료로 써라. 그런데 이사회에서는 하나도 걸러지지 않는다. 모두 정부에서 임명한 사람들이여서 그냥 한다. 외부에서 보면 이사회에서 심의해서 산하기관에 내려왔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관료가 지배해서 찍으면 그냥 내려오는 구조다.

관료 지배는 연구자들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 활동도 방해한다. 왜냐하면 관료들이 연구의제로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이해관계자이기 때문에 기존 시스템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술이나 연구의제, 그런 걸 가지고 정부를 비판하거나 하면 지원 대상에서 뺀다. 의제를 다양하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하고 채택이 돼서 공개적으로 논쟁도 붙고 그래야 하는데 우리는 죽여 버린다. 정부정책에 입바른 소리 했다 하면 그 기관과 연구자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는 거다.

그래서 단순히 연구 활동에 좀 더 개방성이나 창의성, 다양성을 늘리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가 정말로 필요한 과학기술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선 가장 먼저 거버넌스 구조를 민주화해야 한다.

이성우

노정교섭부터, 현장 실무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요구했다. 하나는 연구기관에 독일이나 덴마크, 영국처럼 연구원들이 주축이 되어서 주요 연구 정책이나 의사 결정할 수 있는 구조,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창구로서 시스템을 구축하는 거다.

또 하나는 명망이 있는 개인이 아니라 과학기술시민단체 대표, 노동조합 대표 등 대표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문회의의 민간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구이사 같으면 지금 차관급, 국장급, 흔히 말하는 관료들을 이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최소화해야 한다. 그 다음에 노정협의, 과학기술 관련해서도 현장과의 소통 창구가 필요하다.

기관장이 각 연구소를 대표하는데도 기관장 선임과정에 내부 구성원들이 의사를 피력할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다. 공기업이나 준정부기관은 내부 구성원 대표가 임원추천위원회에 들어간다. 나도 준정부기관에는 들어간다. 그런데 정작 우리 출연연구기관에는 못 들어간다, 이런 구조를 개선해줘야 한다. 적어도 내부 구성원들이 참여해서 기관장을 평가하고 임명하는데 개입한다면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런 몇 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요구해왔지만 아직은 힘에 부쳤다. 지금은 노정협의회 등 여러 가지 고민 중이다.

과거에 가령 막후에서 청와대 또는 과기부처 장관, 보좌관 차원에서 과학정책 현안에 대해 노동조합의 의사를 묻긴 했다. 그조차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없어졌고 지금은 조금씩 있지만 공식화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요구를 해왔지만 실현시키기 위해선 우리의 힘이 더 필요하고 정부차원에서도 대승적 판단이 필요하다.

최연택 

연구자 자신, 과연 우리는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연구윤리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지만 연구 노트 같은 거, 과제 끝날 때 돼서 막 가서 정리해서 쓴다. 논문이나 보고서 관리체계가 미흡하다고 본다.

모든 공간에서 반드시 기록을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하고 공개여부를 제한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지금은 연구자도, 출연연도, 관료들도 기록하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는데 어떻게 검증이 되나. 공개는 두 번째 문제다. 어디까지 공개할지는 정하면 된다. 우리 노동조합이 심의기구 등 제도권 안으로 한 명씩만 위원으로 들어가도 엄청 투명해질 거라고 본다.

오현우

연구자가 여유가 너무 없다. 3책 5공에 의해서 PBS과제를 최대 5개까지 할 수 있다고 치자. PBS 과제를 최대 5개까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보통 주요 사업까지 포함하면 5개보다 훨씬 많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지금 연구자들이 연구과제에 들어가는 비용 등 모두를 기록하고 증빙하고 있다. 행정 지원 인력이 적으니 연구자들의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과제 한 개를 수행하기 위해서 계획서를 쓰는데 한 달이 걸린다. 과제 5개면 5개월이 걸린다. 그 다음엔 연구를 수행한다. 그 다음엔 국민들의 세금을 썼기 때문에 회계 결산의 의무가 있어서 모든 것들을 증빙해야 한다.

연구하는 동안은 기록하기보다는 연구 재료 구입하는데 쓰기 바쁘고 나중에 정리를 해야 하니까, 그 과정에서 잘 못됐던 것들을 찾아내야 하고, 보통 과제 한 개에 한 달이 걸린다.

그러면 이론상으로는 벌써 사업계획서를 쓰고 회계 감사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데 10개월이 소요된다. 산술적으로 이야기하면 과제 5개에 대한 연구는 2개월 가지고 해야 한다.

어떤 과제든지 참여율을 50%이상으로 바꾸면 과제수는 자연스럽게 2개로 준다. 지금 얘기가 나오는 게 참여율 30%이상이다. 참여율 30%이상을 해도 사실은 과제 수가 세 개 반, 네 개 반 되어야 할 것 아닌가.

참여와혁신

총 R&D비용의 규모와 비교해 연구인력의 규모는 어떻다고 보는가?

오현우

우리나라 예산 대비 과학자 수가 적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인건비에 더 투자를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고나 창의력을 구체화시키는 게 실험이지 생산공장 처럼 맨날 실험하는 게 아니다. 창의라는 건 머리돌림이다. 실험은 일 년에 한 두 달만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를 굴리면 놀고 있는 거고, 실험을 하고 있으면 일을 한다고 본다. 실험은 소비다. 돈을 까먹는 거다.

장영배

실험 같은 거 안 하는 인문사회계 연구기관도 PBS가 적용된다. 문제가 뭐냐면, 인문사회계 출연연구기관도 설립목적이 있는데, 기관장 입장에서는 연구자들이 따오려는 수탁 과제가 기관 설립 목적과 안 맞으니까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연말에 인건비를 줄지 안 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회적 양극화니 환경 문제니 빈부격차니 해결하기 위해서 공공기관이 제 역할을 하는 쪽으로 방향 조정이 돼야 하는데, 닥치면 닥치는 대로 돈을 확보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기관장 자체가 그런 걸 고려해서 과제를 취사선택하는 여건이 안 된다. 기관장이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런 성과를 내야겠다, 목표 설정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했다간 뭐가 빵꾸가 날지 모르니까. 한 해 한 해 먹고 사는 거다.

이성우

2015년 당시 조사하니까 출연연 연구사업비가 7조 5천억 원이었다. 임금피크제로 고용창출 성과가 없으니까 1%만 인건비로 돌려라. 750억 원이면 5,000만 원짜리 1,500명을 고용할 수 있다. 임금피크제로 난리쳐서 과기부 전체 해 봐도 100명도 고용 못하면서 호들갑 떨지 말고 1,500명 채용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하라고 기재부에 적극적으로 제안했는데 여지없이 무시당했다.

정부도 그런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채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요지부동이다. 정책을 밀고 가거나,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결국은 현장하고 소통이 없다.

또 연구 현장 내 일부 연구자들은 PBS 이득을 본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PBS는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하다. 관료들은 그걸 핑계로 현장 이야기를 들어봤더니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진짜 현장을 모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