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임단협 즈음 그대, 무엇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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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단협 즈음 그대, 무엇을 꿈꾸는가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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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랄 거라곤 임금인상 … 평생직장 꿈도 안 꿔

노동의 가치? 전문직 자부심? 녹초된 몸뚱이 뿐

 

당신은 노동자인가?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동자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라고 하면 자신들과는 다른 특별한 계층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바로 나 자신이고, 또 우리 이웃이자 가족이다. 임단협이 한창인 지금 우리 이웃의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 목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만났다. 가벼운 술자리 등을 통해 친구에게, 혹은 후배에게 전하는 살아있는 소리를 만나 보자. 철저히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통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10년 만의 폭염이라는데 뚜벅이 인생이 조금은 서럽다. 특히나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 탓에 어지럽기까지 하다. 이런 날은 에어컨 밑에 앉아 온 몸이 전율하는 한기를 느껴보고 싶다.
날도 더운데 7시에 만나기로 한 친구 녀석은 9시가 다 되어서야 나타났다. 그것도 초췌한 모습으로.

“일이 많아서 늦었다고?”
허, 은행원이 무슨 일이 많다고. 나 참!
“더운 날, 사람 짜증나게 할래? 에어컨 밑에서 일하는 녀석이 뭐가 힘들다고.”
“참, 니들 임단협 진행 중이잖아. 어떤 문제에 제일 눈이 가냐?”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엉뚱했다.
“응? 지금 임단협 중이니? 아. 그렇구나. 듣기는 했는데, 근데 요구사항이 뭐냐?”
헉,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라구.
“생업 종사자는 너야. 네가 모르면 어쩌냐.”
“요즘 너네 정년연장이니, 비정규직 문제니 하면서 쟁점이 많은데 사람들하고 이야기 안 하냐?”
“교섭 기간이라는 건 아는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 없어. 나중에 봐서 임금 많이 올려놨으면 좋고.”
“근속년수 되는 선배들은 임금피크제 같은 것 시행해서라도 정년보장만 해 준다면 찬성이래.”
“나? 평생직장, 뭐 그런 건 꿈속 이야기지. 일단 있을 때 돈이나 많이 받자! 이게 내 신조다. 은행원이 나가서 할일이 있어야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술이나 마시자.”

 

“평생직장, 뭐 그런 건 꿈속 이야기지. 일단 있을 때 돈이나 많이 받자! 내 신조다.”

 

틈틈이 공부도 하고 자기계발하면 인정받고 승진도 하지 않겠냐는 위로 아닌 위로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눈치다. 대체로 이 시간에 끝나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데 녹초가 된 몸으로 자기계발 따위가 눈에 보이겠느냐는 반문이다. 그러고 보니 친구의 어깨가 많이 내려앉았다.

임단협과 관련한 좀더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다가, 파업 중인 간호사 후배 얼굴을 떠올렸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친군데 3교대 근무 때문에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얼굴 본 지도 꽤 오래 됐다.
오랜만에 마주앉은 얼굴은 햇볕에 타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파업중인데 사람들이 제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뭐야?”
“주5일 근무제죠.”
병원 주장은 주6일 40시간, 노조는 주5일 40시간이라. 흐음, 병원이라는 공공 영역을 담당하는 이들이 토요일 근무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사람들이 토요일엔 안 아프니. 주6일 근무 말 되네!”

 

백의 천사도 쉬어야 일하지, 지가 무슨 로버트 태권V라고 잠 안자고 못 쉬고 환자를 지키겠어.

 

“간호사는 사람 아니야? 3교대 근무에, 사람들은 계속 줄어들지 죽겠어요. 뭐 수당이나 이런 것 조금 깎여도 상관없고. 그래요, 주6일 근무도 어차피 3교대니까 별로 상관없지만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힘든데요.”
“지방의료원은 사람이 없어서 2개 부서를 하나로 합치고 한 사람이 이것저것 하면서, 몸도 망가지지만 신경쇠약에 드러눕고 싶대요.”

그래, 백의 천사도 쉬어야 일하지, 자기가 무슨 로보트 태권V라고 잠 안자고 못 쉬고 환자를 지키겠어.
꼬마자동차 붕붕처럼 꽃향기만 맡으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니고. 꽃? ‘꽃=돈’ 임금을 많이 주면 열심히 일하지 않을까?

“돈 올려주면 좋죠. 돈 많이 벌려고 직장 다니는데 누가 싫어하겠어요. 간호사 일이 사실 ‘노가다’에 가까워요. 게다가 자기 생각이 별로 없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고. 자기 고민하기도 싫어지고, 몸은 힘들어도 월급만 많이 준다면야 빨리 돈 모아서 그만 둬야죠.”
“일에 대한 자부심? 직장에 대한 애사심? 그런 게 어딨어요!”
한때 자긍심의 상징이던 은행 뱃지를 떼고 다니는 금융인, 전문직에 대한 자부심도, 일에 대한 애착도 잃어버린 간호사. 그들이 출근하는 건 오늘을 연명하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파업 참가율은 어떨까.
“우리 병원도 파업 찬반투표 결과는 높게 나왔지만 실제 참가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우리 병원은 몇 년 전에 파업했다가 깨져서 피해의식이 남아 있거든요. 3교대 근무니까 쉬는 날이나 근무 끝나고 잠깐 들르는 정도예요. 그래서 많아 보이는 거죠.”
“분위기 뜨는 대형 병원들 아니면 다들 그런 편이죠.”
“우리 병원 사람들은 올해 산별노조 덕 좀 봤으면 해요. 조금은 미안하지만 ….”

 

“올해 산별노조 덕 좀 봤으면 해요. 조금은 미안하지만.”

 

사무·전문직의 자부심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다. 자기계발에 투자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 오랜만에 친구, 후배 만나서 즐거웠지만 자꾸 뭔가가 걸린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동차 업체에 다니는 선배를 만나보기로 했다.
“형, 저예요. 요즘 잘 지내요? 컨베이어 타느라 많이 힘들죠. 간만에 술 한 잔 합시다. 네, 제가 찾아 갈게요.”

술이 몇 순배 돌았다.
“파업? 재고 쌓여서 재고 처리하는 거야. 이럴 때 우리도 좀 쉬고. 우리가 1년에 며칠이나 쉴 거 같냐?”
“주5일 근무잖아. 대기업 노동자가 왜 그래, 맘만 먹으면 연·월차 다 쉴 수 있는 사람이. 차나 잘 만드셔, 불량품 쏟아내지 말고.”
괜한 타박으로 슬쩍 심정을 떠봤다.
“후후, 그렇게 쉬어서 어떻게 애 학원 보내고 언제 대출금 갚겠냐. 우리는 시급제야. 내가 벌써 14년차잖아. 그런데도 기본급은 120만원 정도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일한 시간만큼 돈이 되는 거지.”
“어떤 땐 28시간 근무도 한다. 그렇게 해야 돈이 돼. 특근, 철야 안하면 손에 쥐어지는 게 없어.”
“아니. 그러고도 몸이 버텨나요? 형수 과부 만들지 말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올해만 해도 벌써 4명이나 과로로 죽어 나갔다. 같이 라인 타는 선배는 1년에 병원비만 천만원 들어가더라. 온 몸에 파스 붙이고 보약 먹어 가며 일하는 거야.”

 

“같이 라인 타는 선배는 1년에 병원비만 천만원. 올해만 벌써 4명이 과로로 죽어나갔다.”

 

“그래도 회사 잘 나갈 때 열심히 돈 벌어야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리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게 꿈 아니겠냐.”
“철강회사에 다니는 덕규 알지? 그래도 걔는 4조3교대 하면서 여유가 많이 늘었더라. 우리같이 주야 맞교대에 뺑이 도는 건 아니잖아.”
그래. 사람이 좀 쉬어야지, 이게 무슨 짓이람. 1년에 350일 이상 일한다는 선배 얘길 들으면서 철의 노동자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금조성? 글쎄,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랑 별 상관없잖아. 그 돈 우리 줬으면 좋겠다야. 비정규직? 비정규직 사람들 임금 올려주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우리 임금을 줄이는 건 반대야.”

그래도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다닌다는 대기업 노동자들. 그들에게 가치판단의 기준이 ‘돈’이 되어 버린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2004년 여름, 이 땅의 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임금의 가치’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