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영의 콕콕] 토닥토닥, 맥주
[김란영의 콕콕] 토닥토닥, 맥주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9.03.08 20:51
  • 수정 2019.03.29 11:4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란영의 콕콕] ‘콕콕’은 야무지게 자꾸 찌르는 모양을 뜻하는 의태어입니다. 상식과 관행들에 물음표를 던져 콕콕 찔러보려 합니다.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김 기자는 소주? 맥주?”
“저는 맥주로 하겠습니다.”

물어서 대답을 했을 뿐이지만, 소주라고 말하지 못해서 나도 조금 미안하다. 예전보다는 술을 강요하는 문화가 많이들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술자리에선 소주를 마셔줘야 할 것 같다. 어쩐지 우리가 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맥주보다는 더 멋진 느낌도 준다. 그런데도 맥주를 고수하는 것은, 무엇보다 맥주가 소주보다 더 맛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한편으론 소주의 보조적 존재로 취급받는 맥주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맥주! 소맥이 아니면 어때서! 나는 네 모습 그대로 좋다구.”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해 속을 끙끙 앓을 것이냐, 용기 내 사랑을 쟁취할 것이냐, 때로는 ‘공개적 고백’을 앞두고 부단히 망설인다.

나의 맥주 사랑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외국 맥주가 아니어도, 수제 맥주가 아니어도 사랑스럽게 국내 맥주들을 바라볼 정도는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제멋대로 하는 해석이긴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페일에일(Pale ale), 엠버라거(Amber larger), 사우어 에일(Sour ale) 등 맥주 종류와 특징들을 달달 외우는데 집착하면서, 한국 맥주를 터부시하는 태도는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풋사랑 정도로 본다. 적어도 진정 맥주를 사랑하는 이라면 그날 기분과 안주에 따라 ‘카스’와 ‘하이트’, ‘클라우드’와 ‘맥스’를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마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해물탕 같은 국물 안주엔 하이트, 과일이나 치즈같은 안주엔 클라우드를 특별히 고른다.

“도대체 뭐가 달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친구의 물음에 “조금씩, 엄연히 다르다”는 대답밖에.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의 사정은 그리 넉넉지 못하다. 아버지라고 해도 이러한 나의 철학을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하기엔, 어쩐지 민망하다. 겨우 4종류 밖에 되지 않는데도 대체로 식당에서 고를 수 있는 맥주는 한 두 가지로 제한돼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편의점 맥주 냉장고가 아닌 한 어딜 가도 답답함이 영 가시지 않는다. 거기에 소주를 권하는 분위기가 더해질 때면 더욱 더.

물론, 술자리에서 소주를 선택하는 이들의 하루는, 입맛은, 같이 먹는 음식은, 삶의 철학들은 너무나도 다양해서, 그 복잡 미묘한 요소들에 따른 선택을 두고 사회적 강요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또 그렇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위해 마시는 술 때문에 나의 남편이, 나의 아들이 우리 아버지와 똑닮은 똥똥한 배를 가지지 않았으면. 쿡 찌르면 땅땅하던 아버지의 배.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당신께 얼굴의 모든 근육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아내처럼 물었다. “누가 이렇게 당신에게 술을 권했나요?” 아버지는 그저 술냄새를 풍기며 "사랑한다"고 답하셨다. 

사실, 소주든, 맥주든 상관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종과 주량, 속도를 떳떳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형식적인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자유로까지. 언젠간 나와 같은 사람이 유난이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