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난방 파업 ‘인셉션’
서울대 난방 파업 ‘인셉션’
  • 박완순 기자
  • 승인 2019.03.11 12:08
  • 수정 2019.03.11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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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난방 파업

ⓒ 이슬기 서울여대 학생
ⓒ 이슬기 서울여대 학생

영화 ‘인셉션’을 보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람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 무의식은 단계가 있다. 얻기 위한 것이 뚜렷하지 않을수록 점점 더 깊은 단계의 무의식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킥’이라는 충격 행위는 중요하다. 킥을 통해서만 무의식의 바깥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킥이 방해받는다면 무의식으로 들어간 이는 그곳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방해를 피해 깊은 단계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새로운 킥을 받는 것이다. 불행히 마지막 단계 무의식의 심연까지 간다면 자기를 둘러싼 것들이 환상임을 깨달아야만 심연에서 나올 수 있다.

설 연휴가 지나고 세간은 서울대 ‘난방 파업’으로 떠들썩했다. 서울대 학생 사회 내부에서도 노동자들의 정당한 ‘쟁의 행위’라는 의견과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당시 서울대 시설관리직 노동자 파업 기자회견에서 윤민정 학생(서울대, 정외4)의 발언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분리된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안겨줬다. 사실 대학 사회에서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파업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어떤 파업들은 서울대 난방 파업과 같이 큰 주목을 받으며 토론의 장을 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서울여대 청소노동자 파업과 2011년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 파업이다. 윤민정 서울대 학생, 이슬기 서울여대 학생, 김성은 홍익대 졸업생을 차례대로 인터뷰했다.

#1 첫 번째 킥 – 서울대 시설관리직 파업 기자회견 윤민정 학생 발언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저에게 복잡한 감정을 안게 합니다. 대부분 저의 동기들은 여기 있는 노동자들과 다른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의 시선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들의 요구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라고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공동체 성원이라면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소금을 뿌려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시민적 윤리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시민이고 공동체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꼭 같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도대체 청소·기계설비 노동자에게 얼마의 임금을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내 삶을 넘어 타인의 삶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노동자의 파업 앞에 두 가지 삶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과 노동자의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로 분리된 것으로 말이다. 적어도 윤민정 학생의 발언처럼 내 삶을 넘어 타인의 삶에도 따뜻한 관심을 갖는다면 ‘사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에 같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1 고성은 다시 경계에 말뚝을 박는다

경계가 지워지는 것이 느껴졌을 때 쯤이었다. 기자회견이 정리되고 서울대 청소·기계설비 노동자들은 삼삼오오 다시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어떤 학생이 기자회견의 사회를 보던 김선기 민주일반연맹 교육선전국장 앞으로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그 학생의 고성은 김선기 국장이 쥐고 있던 마이크를 통해 그곳에 있던, 그곳을 지나던 사람들의 귀에 박혔다. “시끄럽다고! 기자회견 하지 말라고! 공부하는 거 안 보이냐고!”

날카로운 말뚝의 끝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두 가지 삶을 분리하는 경계가 길쭉한 흉터처럼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이러한 일을 겪었던 서울여대는 어땠을까?

#2 두 번째 킥 – 노란 포스트잇의 대화

2015년 4월 서울여대 청소노동자는 파업을 한다. 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철폐가 그들의 요구사항이었다. 이슬기 서울여대 학생은 당시 서울여대학보사 편집장이었다. 이슬기 학생과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 사이에 청소노동자 파업을 두고 큰 갈등은 없었다고 한다. 페이스북 대나무숲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청소노동자 파업을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약간 있었지만 서울여대 학생 사회의 전체 여론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청소노동자 파업 초기에 청소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하는 학생 모임과 서울여대학보사에서 청소노동자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청소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하는 학생 모임에서는 관련 카드 뉴스를 제작했다. 서울여대학보사는 파업 과정을 계속 학생 사회로 옮겨 보여줬다.

그 결과 서울여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청소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학내에 붙였고 청소노동자들은 성명서 위에 포스트잇으로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또 학생들은 그 메시지에 포스트잇으로 답을 했다. 학생과 청소노동자들이 주고받은 노란 포스트잇은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하기 위해 상호 실질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 상징이다. 나아가 서울여대 학생들은 포스트잇 대화뿐만 아니라 스스로 청소노동자와 간담회를 열어 자신들이 가진 파업에 관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풀어나갔다.

ⓒ 이슬기 서울여대 학생
ⓒ 이슬기 서울여대 학생

#2-1 현수막 철거는 포스트잇을 찢었다

서울여대 학생들은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는 아주 간단한 명제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실천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줬다. 그러나 어렵게 만든 이 모범이 아주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울여대가 축제를 시작한 날 자정에 서울여대 곳곳에 걸려 있던 청소노동자 파업 현수막이 철거됐다. 축제를 즐겨야 하는데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총학생회가 철거에 나선 것이다. 그 이후 문헌정보학과 학생은 이런 제목의 대자보를 붙인다. ‘서울여대의 축제는 끝났습니다.’ 대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서울여대 총학생회보다 심한 반응을 보였던 2011년 홍익대는 어땠을까.

#3 세 번째 킥 - 대화의 범위

2011년 홍익대 역시 임금 문제로 청소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파업 중에 당시 홍익대 총학생회장은 청소노동자의 파업을 학습권 침해로 규정하고 청소노동자가 파업을 진행했던 농성 천막에까지 찾아와 입에 담기도 험한 말을 뱉었다. 총학생회장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청소노동자 파업을 반대하는 여론이 지지하는 여론과 비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소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학생들은 대화의 범위를 넓혔다. 단순히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닌 서로의 삶을 함께 일상적으로 나누는, 서로 다른 두 삶이 마주보고 나누는 대화로 말이다. 두 삶은 어떻게 대화를 했을까. 당시 홍익대 청소노동자 파업 지지 학생 모임을 했던 김성은 홍익대 졸업생에게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작교실을 했죠. ‘시간을 돌리는 작은 교실’이라고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시간을 가졌어요. 시작교실을 하면서 단순히 컴퓨터 활용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 한 게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데 뭔가 기폭제가 됐겠죠. ‘소란스런 바자회 ing’도 했어요. 청소노동자들과 같이 청소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버튼도 만들어서 팔고, 그냥 이것저것 자신들이 팔고 싶은 물건도 팔았어요.

청소노동자와 학생들 사이가 더 돈독해졌죠. 서로의 삶이 있다고 인지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거죠. 진짜 이해를 시작한 거죠.”

ⓒ 윤민정 서울대 학생
ⓒ 윤민정 서울대 학생

#4 경계 짓기, 경계 허물기

인터뷰를 진행한 세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질문을 마지막에 던졌다. “학생들은 왜 자기가 노동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세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면 이렇다.

대학생들이 사회가 만든 환상 속에 놓여있다. 대학생이 흔히 말하는 블루칼라 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사회는,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은 주변에서 ‘너는 올라갈 수 있어, 더 위로 말이야. 그런데 지금 더 열심히 해야 해. 옆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다. 그러나 소위 관리직도 전체 파이가 정해져있다. 어릴 때부터 환상이 실제인 양 바라본 대학생들은 이 사실을 자의든 타의든 받아들일 수 없다. 세 사람은 모두 이게 대학생들의 개인 책임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윤민정 학생은 앞으로 “서울대 학생과 학내 노동자들의 삶을 교류하기 위해 단순히 성명서로 지지를 표하는 것이 아닌 접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업을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에서 진행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래도 희망을 본 부분은 우리가 민주적으로 토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설관리직 노동자의 파업에 연대하는 것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고 5일간의 서울대 난방 파업이 학생 사회에 던져준 의미를 되새겼다.

이번 서울대 시설관리직 노동자 파업을 ‘난방 파업’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비단 학생 사회만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가 ‘경계 짓기’에 능숙한 사회임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이 경계는 서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텅 빈 공간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 천천히 다가가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접점을 계속 만든다면, 그리고 서로에게 다가갈 때 왜 가야느냐고 묻는 사람과 민주적 토론이 가능하다면 우리사회가 만든 환상은 녹아내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