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먼 미래에서 온 약속
[박완순의 얼글] 먼 미래에서 온 약속
  • 박완순 기자
  • 승인 201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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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작년 10월 예스24가 ‘독자들이 직접 선정한 노벨문학상’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결과, 1위로 한강 작가가 선정됐다.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는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섬세한 언어로 표현한 비극을 통해 인간애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그러한 고민 지점을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기에 1위로 등극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한 높은 인기는 인간애를 상실한 지금 우리 사회의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시민들은 인간성이, 인간애가 결핍된 현장을 목격하거나 그 결핍을 만들어가는 데 파괴적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 굳이 열거할 필요 없는 다양한 혐오와 차별이 그 예이고, 방송에서부터 일상생활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퍼져 초등학생, 유치원생도 사용하는 ‘극혐’이라는 단어도 그 예다.

혐오와 그로 인한 차별이 난무하는 공동체는 아무래도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누구나 감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그 감각에 대한 의미 있는 증거를 찾지 못하면 혐오와 차별은 우리 사회에 스며들 뿐이다.

의미 있는 증거를 제시해보려 한다. ‘게이 인덱스’라는 지수다. 이 지수는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가 개방성과 다양성을 측정하기 위해 동성애자를 지표로 삼아 측정한 지수다. 리처드 플로리다의 연구에 따르면 게이들의 밀집도를 기준으로 지역의 순위를 매긴 결과 게이가 많이 거주하는 도시일수록 첨단산업이 발달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왜? 소수자에 대한 포용성 없는 공동체는 다양성이 발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혁신이 지체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발전 역시 비슷한 경로로 해석할 수 있다. 혐오와 차별은 배타성과 함께 극단적인 개인 혹은 집단 이기주의를 유발한다. 포용성 없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의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은 상상할 수 없다.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 철저하게 부정된 상황에서 정치적, 사상적 다양성은 성장할 수 없다.

결국 정치적, 사상적 다양성이라는 토대 위에 쌓아올려야 할 민주주의는 자신의 터전을 잃고 만다. 이렇게 혐오와 차별이 지속되는 이상 공동체의 산업도 발전되지 않을뿐더러 공동체의 정치적 붕괴까지 도래할 수 있다.

의미 있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혐오가 쉽게 멈추지 않는 특수한 이유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일상이 시민들의 인권 감수성을 무디게 하는데 충분한 사회경제적 틀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일상은 개인의 정치적 발언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약자에 대한 폭력의 부당성을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거나 폭력에 동조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을 확률이 높아진다.

경제적으로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계층 간 간격이 좁혀질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OECD 불평등 지수만 봐도 손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방인, 즉 여성은 물론 외국인부터 지방의 사람들이 경제 공동체로 유입되는 것은 곧 자신의 경제적 생명력에 위협 받는 행위로 규정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일상은 인권 감수성을 높일 여유가 없는 공간이다.

우리 사회에 희망은 없나?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는 생각보다 시간이 지난 '추억' 내지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지만 2016년 겨울 광화문광장의 모습은 여전히 희망은 존재한다는 생생한 증거였다.

당시 광장의 집회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모습들 중 하나가 혐오와 차별에 대한 발언을 서로가 자제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광장에서 시민들은 혐오와 차별을 우리가 극복해야할 하나의 과제로 상정했다.

이러한 모습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래를 향한 인류애 때문이다. 광화문광장에서 많이 회자된 두 구호에서 알 수 있다. 청소년이 아닌 시민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음 세대에게 이러한 현실을 물려줄 수는 없다.” 청소년인 시민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물려주기 싫은 현실과 살고 싶지 않은 세상에는 혐오와 차별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공유한 미래 세대에 대한 걱정과 그 걱정을 해결해야 한다는 약속은 인권 감수성을 높였다. 먼 미래에 언제, 어떻게 존재할지 모르는 타자에 대한 고통을 나눈 것이다.

이제 이 먼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조금씩 당겨오면 현재가 된다. 어찌 보면 먼 미래에 대한 약속은 현재의 약속으로 시간적 순서를 거슬러 돌아올 수 있다. 먼 미래에서 온 약속을 반갑게 오늘 맞이하는 순간부터가 혐오와 차별을 야기하는 것들에 맞설 수 있는 첫 단계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