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산업적 화전민
[박완순의 얼글] 산업적 화전민
  • 박완순 기자
  • 승인 2019.03.27 11:34
  • 수정 2019.03.27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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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염세와 허무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단어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고(신박하기도 하면서) 본다. 그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 등장한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우리 사회에 널리 쓰인다.

이런 그가 쓴 재밌는 단어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문화적 화전민’이다. 유행에 민감한 일본인들을 비꼰 단어다. 소위 힙(hip)한 것만 쫓는, 힙함의 최전선에서 들불처럼 타오르고 재가 되면 다른 힙스러운 공간으로 가는 세태를 비판한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문화적 화전민이라는 단어에 생각을 더한 우리나라 작가가 있다. 김사과 작가인데 그의 산문집 『0이하의 날들』 중 ‘힙스터는 어디에 있는가’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힙스터(hipster)들은 더 이상 창조적이고 급진적인 반문화가 태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존의 반문화를 패션이자 라이프스타일로 소비하는 최첨단 소비집단이다. (중략) 힙스터 세계에서 삶의 모든 영역은 패션이 되어버린다. 아니 새로운 패션을 위해서 현실을 액세서리화한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4차 산업혁명이 떠올랐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으로부터 뻗어난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인공지능(AI), 사물기반인터넷(IoT), 빅데이터 기반 기술 혁신, 스마트팩토리 등등. 4차 산업혁명의 장밋빛 미래들을 전망하는 단어였다. 실제로 많은 이들 역시 4차 산업혁명이 사회에 새로운 산업 동력으로 자리할 것이라 생각한다.

동시에 ‘4차 산업혁명 힙스터’가 떠올랐고, ‘4차 산업혁명 화전민’이 떠올랐고, 결국 ‘산업적 화전민’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가 너무 4차 산업혁명의 패션화된 구호만을 소비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문은 왜 생겼을까. 나는 나에게 좀 더 묻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고 듣고 읽은 몇 가지 것에서 의문이 출발했다. 카풀 서비스를 두고 생겼던 택시와 카카오모빌리티 간의 갈등, 행정·공공기관 고지서를 모바일로 발송하는 서비스에 대해 반발하는 우정노동자, 로봇팔이 등장하면서 컨베이어 라인에 굳이 원래 필요했던 두 명의 노동자가 필요 없어진 것. 시간을 좀 더 건너 뛴 생각까지 갔다. 19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람의 손이 더 이상 많이 필요하지 않아 방적 노동자들 거리로 나앉은 것.

물론 산업혁명이 가져온 우리사회의 발전과 편의에 대해서는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산업의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산업이라는 외양을 본다. 외양의 신비로움에, 때로는 경이로움에 놀라 실제 산업을 지탱하는 노동자는 어디로 흘러가는 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니, 누군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 자신은 그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산업혁명이라는 메시지만 패션화해 걸쳐 입고 소비하면 되니까.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혁명처럼 등장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보스포럼 참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지 말고, 불평등을 초래하는 당신들의 행동에 대해 숙고하라"고 호소했다. 교황의 눈앞에는 산업적 화전민이 질러 놓은 불로 다 타버린 잿더미 위에 주저앉은 사람들이 누구일지 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교황의 걱정에 동의한다. 동의와 더불어 예상할 수 있는 광경 앞에서 굳이 불을 지르지 않기를, 불이 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또한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뀜과 맞물려 산업을 지탱하는 노동자의 삶 역시 긍정적 방향으로 바뀔 수 있도록 우리사회가 머리를 맞대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