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혜의 온기] 위신재(威信材)를 잃은 사람들
[최은혜의 온기] 위신재(威信材)를 잃은 사람들
  • 최은혜 기자
  • 승인 2019.04.01 14:48
  • 수정 2019.04.02 09:3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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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記 따뜻한 글. 언제나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최은혜 기자 ehchoi@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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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신재(威信材)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신분이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주로 옛날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경주 금관총의 금관이나 각종 왕릉에서 발견된 거울, 귀걸이 등의 껴묻거리가 바로 위신재입니다. 이 위신재는 고고학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위신재는 보통 사원증 혹은 작업복일 것입니다. 사원증이나 작업복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소속’이나 ‘직책’을 알려주니까요. 저도 얼마 전 위신재를 갖게 됐습니다. 바로 ‘기자증’입니다. 만약 제가 죽었을 때 기자증을 함께 묻는다면, 후대 사람들은 제가 기자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소속’과 ‘직책’이 생긴다는 것은 묘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성취감과 자부심, 책임감과 더불어 이름 모를 오묘한 감정. 저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개인’으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소속’과 ‘직책’으로 평가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기자증에 잉크도 안 마른 풋내기 기자의 양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기자증을 들고 처음 마주한 현장은 청호나이스노조의 총파업 현장이었습니다. 700여 명이 차가운 도로에 주저앉은 모습이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닌데 생경했습니다. ‘기름값 자비 부담’의 부당함을 제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0년 이상 청호나이스 소속으로 회사에 다녔지만 자회사 전환 이후 ’청호나이스 배지‘도 못 달고 다닌다’며 넋두리 하는 노동자. 청호나이스노조 조합원들은 정규직 전환 이후 더 이상 청호나이스 소속이 아닙니다. 청호나이스 정규직이 아니라 자회사 나이스엔지니어링의 정규직이기 때문입니다. 소속이 바뀌었으니 ‘청호나이스 배지’가 아닌 ‘나이스엔지니어링 배지’를 달고 다니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후 첫 외부일정으로 인천공항을 방문했습니다. 공항에서 일하는 “1만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연내 정규직 전환 채용 하겠다”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한 대통령은 같은 해 7월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우리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습니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은 기회의 공정성 등을 이유로 민간업체 위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람이 민간 기업에도 불고 있습니다. 청호나이스도 여기에 편승해 특수고용관계에 있던 설치·수리 기사를 자회사 소속 정규직으로 전환했습니다. ‘고용이 불안하지만 본사 소속’인 사람들은 ‘고용이 안정적이지만 자회사 소속’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설치·수리 기사들은 급여 삭감 등의 불이익을 겪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가지고 있던 ‘위신재’를 잃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이제 겨우 위신재를 받은 저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소개할 때 ‘소속’과 ‘직책’으로 소개하곤 합니다. 고객들을 만나는 청호나이스노조의 설치·수리 기사도 자신을 ‘청호나이스 엔지니어’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청호나이스 엔지니어’가 아니라 ‘나이스엔지니어링 엔지니어’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청호나이스 제품을 가득 실은 차를 타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