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이자 불꽃이었던 이름, 윤상원
들불이자 불꽃이었던 이름, 윤상원
  • 강은영 기자
  • 승인 2019.0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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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이 아닌 투쟁을 선택한 열사의 삶
‘노동’을 사랑한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커버스토리] ② 윤상원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노동조합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항상 이 노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때로 정부가 나서 ‘제창 불가’의 딱지를 붙이기도 한 노래의 제목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제는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아시아 곳곳의 인권운동 현장에서 그 나라의 말로 번안되어 널리 불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런데 뜨겁게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이 노래는 사실 슬픔의 노래[悲歌]이고 사랑의 노래[戀歌]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에 위치한 전남도청으로 진입하던 그 순간, ‘최후의 일인’ 윤상원은 끝내 죽음을 택했다. 그의 시신은 망월동 공원묘지에 버려졌다. 1978년 성탄절 밤이 지나고 찾아온 12월 26일 새벽, 한밤중까지 야학에서 쓸 땔감을 구하고 돌아와 쓰러져 잠든 박기순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12월 26일 저녁 박기순의 시신이 안치된 전남대병원 앞에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김민기는 영안실로 달려와 목을 놓아 ‘상록수’를 불렀다.

1982년 2월 20일, 윤상원이 ‘버려졌던’ 망월동에서 윤상원과 박기순이 하나가 된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71학번과 국사교육과 76학번, 노동자를 위한 ‘들불야학’에서 함께 일한 인연의 두 사람은 이 날 영혼결혼식을 통해 부부가 된다.

둘의 영혼결혼식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노래굿 <넋풀이-빛의 결혼식>의 주제곡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한 부분을 차용해 황석영이 노랫말을 만들고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윤상원은 당시 최고의 직업 중 하나였던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서 근무하던 윤상원은 은행을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가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전국단위 노동운동 조직을 지향했던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하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투쟁, 혼돈의 광주 속에서 윤상원이 외친 것

1980년 5월 18일 아침, 윤상원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와 함께 전국 대학 휴교 조치와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에 대한 비방금지 등도 함께 내려졌다.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퍼졌던 민주화의 열망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광주에도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으로 계엄군들이 배치됐고, 학생운동·사회운동 지도부들이 검거됐다. 이 때 김상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주요 인물로 꼽혀 예비 구속됐다.

광주시민들과 계엄군들의 대치는 20일까지 이어졌다. 윤상원은 들불야학 팀과 함께 21일부터 ‘투사회보’ 제작을 결심한다.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니 광주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된 건 같은 날 오후 1시경이었다(최초 발포는 19일). 광주시민들을 상대로 요란한 총성이 터졌다.

그 날 저녁, 계엄군이 점령하고 있던 전남도청에서 물러나면서 광주는 해방구를 맞이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며 윤상원은 시민들을 결집시키고 지휘할 수 있는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윤상원은 김상윤과 함께 운영하던 녹두서점에 모여 박효선, 김영철, 김상집 등과 함께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하는 한편 총기회수 반대와 무장투쟁을 결의했다. 이는 당시 지도부를 자처하던 수습대책위의 총기반납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수습대책위의 주장대로 총기를 반납하는 것은 항쟁 발발 이후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져갔던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항쟁의 정당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들불야학 2기 강학으로 활동했던 전용호 씨는 윤상원과 함께 밤을 새우며 도청을 지켰던 24일 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모여 자체 경비를 서기 위해 무기를 공유해달라고 찾아왔다”며 “그 모습을 보며 자체적으로 경비 설 정도로 광주에 민주화 의지가 확산됐으니 자체 경비군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윤상원 선배에게 말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윤상원은 이렇게 답했다.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과 자체 경비를 서는 직장인들의 성격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건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지, 군인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윤상원은 광주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꿰뚫어 보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용호 씨는 “당시에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배의 상황 판단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놀랐다”고 회상했다.

25일 밤을 기해 항쟁 지도부가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투쟁위원회로 바뀌면서 결사항쟁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위원장은 정상용이, 대변인은 윤상원이 맡았다. 그는 26일 오전 외신 기자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오후에 기자회견을 열었다.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전달해줄 수 있는 기자들이 필요했다. 당시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브래들리 마틴은 윤상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상원은 탁월하게 용감했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말하기를 그의 지지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와 최후의 투쟁 속에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윤상원은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26일, 윤상원 생의 마지막 밤. 그는 진압 작전을 펼치려는 계엄군에 맞서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다. 하지만 여자와 어린 학생들, 또 자발적으로 모이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27일 새벽, 윤상원은 계엄군의 총에 맞아 30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들불야학, 노동자들을 일깨우다

윤상원은 자신의 터전 광주에서 ‘들불야학’을 이끌었다. 은행에 사직서를 내고 광주로 내려와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윤상원을 들불야학으로 끌어들인 것은 박기순이었다. 박기순은 ‘들불야학’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자, 시간이 흘러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으로 맺어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박기순의 열정적인 설득 끝에 윤상원은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들불야학’ 강학이 되기로 결정한다. 낮에는 양동신협에서 일하며, 밤에는 강학으로서 고된 나날들을 보냈지만, 그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들불야학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려던 찰나, 갑작스러운 변고가 찾아왔다. ‘동지’ 박기순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것이다. 광주 일원의 재야 청년 활동가들은 장례식에 모여 박기순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장면은 정보과 형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경찰은 학교와 가족을 동원해 ‘들불야학’에 강학으로 참여했던 전남대 학생들의 탈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전용호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들불야학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가 ‘아들이 불량 서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며, 들불야학 활동을 그만두라고 꾸짖었다”면서 “집이 시골인 학생들은 강학 활동을 하는 데 크게 제약을 받지 않았지만, 광주에 집을 둔 경우에는 들불야학을 탈퇴하라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2기 강학 활동을 하던 여학생은 부모님의 압박에 못 이겨 윤상원 선배를 찾아가 한바탕 울음을 토하고 그만두기도 했다”며 “선배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고 회상했다.

윤상원은 박기순을 잃은 슬픔을 딛고 들불야학을 단단히 하고자 더욱 매진했다. 그녀의 뜻을 이어받기 위한 그의 책임감은 강해졌다. 강학 활동을 위해 세미나에 참여했던 전용호 씨는 당시 윤상원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처음 윤상원 선배를 본 건 대기 강학 세미나 때였는데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며 “대학 신입생이었던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부분들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설명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윤상원은 후배들에게 따뜻하고 인간미 넘쳤던 사람이었다. 전용호 씨는 “목소리가 좋아 노래도 잘 하고 잘 생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며 “아주 치밀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순수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좋은 형님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상원, 노동운동에 뛰어들다

지난 3월 5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지부는 대의원대회에서 윤상원 열사에게 명예조합원증을 추서했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열사와 KB국민은행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KB국민은행지부 관계자는 “최근 윤상원 열사가 KB국민은행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록 고인이 됐지만 명예조합원증을 추서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윤상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사업들에 대한 기부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후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에서 6개월 간 행원으로 근무했다. 주택은행은 이후 국민은행과의 통합을 통해 오늘날의 KB국민은행이 됐다. 70~80년대 당시 최고의 직장 중 하나는 은행원이었다. 안정적인 일자리, 높은 보수 때문에 누구나 선망하던 직업이었다.

그는 은행원으로서 반 년도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접한 이후 윤상원은 자신의 삶을 노동자·민중과 함께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월급쟁이로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살기보다는 사회를 바꾸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서울에서 은행원 생활을 정리하고 광주에 내려온 윤상원은 부모님에게 돌아가지 않고 ‘한남프라스틱’이라는 회사에 위장취업을 했다. 아직 광주에 노동운동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기에 현장을 경험하면서 활동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6개월의 짧은 생활이었지만, 양복을 입던 윤상원이 육체노동을 시작하려하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일기에서도 공장 노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엿볼 수 있다. 이후 윤상원은 들불야학에 매진하게 되면서 한남프라스틱 노동자 생활을 정리하고, 양동신협으로 다시 한 번 직장을 옮긴다.

아고매! 피곤허다. 정말로 피곤해 미치겄다.

난생처음으로 공장 노동을 시작해 보는 날이었다.

도시락을 자전거 뒤에 꽁꽁 매달고 늦을 세라 페달을 밟아 공장에 도착해 보니

아침 7시 50분 꽤 정확한 셈이다.

공장장 인도를 받아 절단부로 배치됐다.

- 윤상원 열사 일기 中

전민노련 중앙위원으로,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을 전후해 민주화의 열망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60~70년대 내내 민중을 가혹하게 억눌렀지만 끝까지 지속될 수는 없었다. 박정희가 죽기 직전에 일어났던 부마항쟁을 비롯해 1980년 4월의 강원도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쟁의까지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박정희가 죽은 이후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는 동안 짧았던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이 시기 윤상원은 노동운동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주에 내려와 교류하기 시작했던 이태복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였다. 이태복과 노동운동의 방향성을 논의하면서 전민노련 결성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계획한다. 하지만 윤상원을 매일 만나던 사람들조차 이태복과의 관계를 알지 못할 만큼 비밀리에 움직였다.

윤상원은 2년간 활동하던 들불야학을 정리하고 노동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1980년 4월 호남지역을 대표해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맞닥뜨렸다.

윤상원 정신, 어떻게 이어져야 하나

누군가에게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으로 윤상원이 기억되고 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윤상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기억되길 바랄까. 김상윤의 동생이자, 윤상원과 항쟁을 함께한 김상집 씨는 “윤상원 열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총무로서,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으로서, 또 들불야학의 지도자로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윤상원 열사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윤상원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한 전용호 씨는 “대표적인 인물에 대한 일화는 역사적 사건을 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상승작용을 한다”며 “윤상원 열사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질 때 광주의 항쟁이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뜻을 모아 지난 2013년 출범한 (사)윤상원기념사업회는 초대 김상윤 이사장에 이어 2018년 12월 새롭게 선임된 이태복 이사장을 거치며, 윤상원 열사를 기억하고 그를 통해 광주를 알리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이면 광주민주화운동과 윤상원 열사의 40주기를 맞는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되살아난 윤상원 열사의 정신은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2016년과 2017년 전 국민적인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소수의 집권자가 아닌 다수의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늘,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윤상원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윤상원의 호는 해파(海坡)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그는 거센 바닷바람을 제일 먼저 맞으며 광주의,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언덕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언덕을 오른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의 결과를 향유하고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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