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5월이 과거에 박제되어서는 안 된다
광주의 5월이 과거에 박제되어서는 안 된다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9.04.02 07:50
  • 수정 2019.04.05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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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하게, 우리의 것으로 기억하기

[커버스토리] ③ 광주의 5월, 어떻게 기억돼야 하나

광주광역시엔 시민들을 자꾸 39년 전 5월로 데려다 놓는 버스가 있다. 노선번호는 518번.
광주광역시는 지난 2004년 기존에 운행하고 있던 25-2번 버스의 노선번호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기념일을 딴 518번으로 바꿨다. 4년 뒤엔 상무시민공원, 금남로4가역, 전남대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요 장소를 중심으로 경유지를 추가했다. 광주시는 “민주화를 위해 1980년 5월 18일 광주가 흘렸던 피와 땀을 후손들이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봄을 앞둔 어느 날 광주 시민들과 함께 518번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광주의 5월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광주 #5월

#시내버스 정류장
#518번 버스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 붙들어 있었지. 집 앞엔 장총을 지닌 군인들이 지나가고, 골목엔 사람들이 트럭에 타있고. 멋모르는 아이들은 전쟁이 끝났다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서울에서 518번 버스를 타러 광주에 왔다는 기자에게 송명숙 할머니(가명·83)는 두서없이 그날의 기억을 풀어냈다. 깊숙이 찌르지 않아도 툭 하고 튀어나오는 기억들. 5.18 민주화운동은 살아있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꿈틀대고 있었다.

#5.18 자유공원
#나 혼자 #“누가 여길 찾아오고 싶겠어요?”

“이념을 다 떠나서 기본 아니에요? 기본? 나라를 지키라고 군인을 만들어놨더니… 어느 정도껏 했어야지. 여기는 아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막 했으니까. 5.18 민주화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 여기 와서 강제로 다 보라고 해야 해요. 그러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5.18 자유공원에서 만난 김현민(가명·59) 씨는 최근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발언에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 씨는 “5.18 민주화운동은 불과 40년 전의 일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현존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 사람이길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전남대학교
#5.18 광주민주화운동 발원지

“정말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야?” 전남대학교에서 만난 대학생 송승교(24) 씨는 화를 내는 대신 물음표를 던졌다. 송 씨는 “5.18 민주화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할만한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5.18 민주화운동을 민주항쟁으로 배워왔다. 부모님 세대가 겪은 일이라 어려움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배워왔던 것과 달라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망월묘역
#도대체 왜?

죽음을 앞두고 전화로 식구들을 안심시키던 네가 주검으로 돌아온 아침 애미 가슴도 이 나라 정의도 무너지더니 17년 세월 끝에 이제 너를 내 가슴에서 보낼 수 있게 됐구나 애미가 (박병규)

아버지 당신의 숭고한 뜻은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으로 남아 바른 삶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못 다 이루신 한 훌훌 털어버리시고 부디 편히 잠드소서 (임은택)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최미애)

어머니 참으로 불러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참았습니다 이제는 여러 벗들과 편안하게 쉬십시오 (김오순 ·이영우)

평일 오전. 아무도 없는 망월묘역엔 죽은 이들에게 전하지 못한 가족들의 짧은 편지가 비석에 박혀 조용히 메아리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날 것의 기록이 중요한 이유

5월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망월동 구묘역, 5.18 자유공원처럼 물리적 공간 그 자체로 기억하는 방식도 있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그날의 기록들로 지금의 시간과 장소를 1980년 광주의 그 날, 그곳으로 불러들이는 방식도 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5.18 민주화운동의 ‘박물관’ 격인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이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은 지난 2015년부터 약 3만 8,000여 점에 이르는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기록물 3,800여 점은 2011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기록관은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중에서도 시민들의 성명서, 선언문, 일기, 사진 자료들을 중점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적절한 보폭으로 그날의 기록을 마주하는 이들이라면, 그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김태종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연구실장. 그는 5.18 민주화운동 기간 시민궐기대회 사회를 맡은 5.18 민주화운동의 당사자이자, 당시의 기록을 적극적으로 지켜낸 장본인이다. 39년 전, 전남대 4학년 학생이던 그는 낭독이 끝난 선언문과 유인물 30여 점을 꼼꼼히 챙겨뒀다. 당시 광주가 외부로부터 고립된 상황을 감안했을 때 현장에서 나온 기록들이 중요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가 챙겨둔 기록물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을 피해 서울에 있던 서울대생 황선진 씨에게 갔다가 6년 뒤 광주로 돌아왔다. 이후 기록물들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감시를 피해 원본 그대로 보관되다가 2005년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중 15건은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이 됐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주는 힘은 기억에 있으며 기록물은 그 기억을 보호해준다.” 김 연구실장은 그 날의 기록물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과정을 설명한 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말을 인용해, 기록물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이어 그는 “사진과 영상처럼 왜곡할 수 없는 기록물들이 가진 힘이 사회를 지탱하는 자양분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그날의 유일(唯一)한 기록들은 시간이 지나서도, 그 날의 광주로 우리를 불러내는 매개체이자, 그 날의 진실을 지켜주는 뿌리 깊은 방패가 된다.

진실, 그대로 기억하기

5.18기념재단의 ‘고백과 증언센터’는 지난해 3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5.18진상규명법)이 만들어지면서 꾸려진 TF(Task Force)팀이다. 활동 기간이 3년으로 제한된 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특별히 가해 당사자(군) 측의 증언을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피해자들이 중심이 돼 전해진 진실에 가해자 측의 증언을 더하면 그날의 진실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용기를 내 재단의 손을 잡은 이들은 15명 남짓. 박채웅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피해자인 가해 당사자들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지켜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피해자와 가해자들 간의 화해를 꾀한다고 전했다. 박 팀장은 “시간이 더 늦기 전에 (가해 당사자분들이) 쉽지 않겠지만, 고백과 증언으로 용서를 구하고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북한군 광주 침투설 등 유튜브 채널에서 유통되는 가짜뉴스들에 우려를 표했다. 박 팀장은 “지금이야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진짜처럼 인식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사람들이 (가짜뉴스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국가 차원의 조속한 진상규명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왜곡된 정보를 퍼 나르는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왜곡처벌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팀장은 “있었던 일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5.18민주화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만 명확하게 기억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우리의 기억’ 되려면

한편, 일각에선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오롯이 지켜내는 노력만큼이나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5.18 민주화운동이 다소 성역화 내지 신성화된 방식 중심으로 기억되고 있어서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에게는 그들의 일상과는 고립된 역사로만 그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옛 전남도청을 원형 복원해야 한다는 외침을 들어도 ‘문제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의 나에게 5.18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옳은 동시에, 그렇기에 더욱 어렵고 거리감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 2018년 5월 옛 전남도청 임시 개방 행사를 관람한 한 대학생의 감상, 박경섭, 『기억에서 기념비로, 운동에서 역사로』, 2018에서 재인용

박경섭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논문에서 “역사적 현장의 보존, 사실의 기록과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이 동시대 사람들의 삶과 연계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며 “5.18 민주화운동의 부단한 현재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연구원은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몫이기도 하다”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후세대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더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소중한 자산이 돼 온 5.18 민주화운동. 아직까지 가해자들과 일부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고 있는 만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남은 과제를 하루속히 해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울러 더 이상 왜곡되지 않도록 그날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나 거기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생명력을 잃은 박제로 남은 역사는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 현재의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80년 5월의 광주와 윤상원 열사가 낯선 이야기일 뿐이다. 박 연구원이 강조하는 ‘부단한 현재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그러한 현재화가 이루어질 때, 다시 말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 하더라도 그날의 역사와 정신을 공유할 수 있을 때,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