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영의 콕콕] 콜드 콜(Cold call)
[김란영의 콕콕] 콜드 콜(Cold call)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9.04.19 12:55
  • 수정 2019.04.19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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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콕’은 야무지게 자꾸 찌르는 모양을 뜻하는 의태어입니다.
상식과 관행들에 물음표를 던져 콕콕 찔러보려 합니다.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애초에 받지 말았어야 했지만, 받고야 말았을 때. 정중히 사정을 얘기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그녀는 한 순간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거절할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일까? 일종의 업계 ‘전략’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전략이 무색할 정도로, 정작 말하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조차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저 이렇게까지 밥벌이해야 하는 사회인가하며, 슬퍼졌다.

그러다 정말이지 말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죄송하지만 끊어야 할 것 같아요” 했다. 그제야 건너에서도 처음으로 숨을 좀 고르더니“아, 네…” 했다. “결국 살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전화를 끊는 게 나아.” 문득,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조언도 떠올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화를 끊는 편이 상대방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준다는 의미에서 낫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들의 태도가 차갑다 해서 붙여진 이름의 ‘콜드콜(Cold call)’. 흔히 마케팅이나 홍보를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화를 걸어 영업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전 직장 대표이사는 자신이 한 때 영업사원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셀 수도 없이 많은 콜드콜을 했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외국에 본사를 둔 IT기업 한국 지사였는데, 당시 20여 년 전만 해도 주력 소프트웨어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인지도가 너무나 낮아서 전화를 걸었다 하면 “그게 뭔데요?”라는 퉁명스러운 질문부터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민망함과 때로는 수치(?)스럽기까지 한 전화들을 극복했냐고 물어보니 “종종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기운을 냈다”며 ‘비법’을 전수했다.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보이면서 사주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었고, 사지는 않더라도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본다거나,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영업사원만큼은 아니겠지만, 소위 ‘귀동냥’으로 먹고사는 기자들에게도 전화를 거는 일이 주요한 업무이기는 마찬가지다. 생전 만난 적도 없는 이들에게 취재를 부탁하려 전화를 걸다 보면 역시나 다양한 태도들을 경험하기 일쑤다. “내일 전화를 달라”고 해서 다음 날 전화를 걸었더니 ‘회의 중’. 그리고 그 다음날도 회의 중. 그는 내내 회의만 하는 모양이었다. 지난 달 만났을 땐, 웃는 얼굴로 헤어졌던 이들도 전화만 걸면 성가시다는 태도를 보인다. 때로는 “딸 뻘인 것 같은데, 그래도 너무 모르네”하며 대놓고 무시를 하는 이들도 있고, 때로는 상대방의 입장을 들으려 전화를 걸었다가 대뜸 ‘기레기’들을 대표해서 혼이 나기도 했다.

최근 한 여당 국회의원 의원실은 전화를 받자마자 “기자가 적어도 스스로 판단해서 기사를 써야지 노동조합 입장을 그대로 받아서 쓰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의원실 쪽 입장을 들으려 전화했을 뿐이다. 그런 것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답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갑작스러운 무례함에 당황해서 심장이 뛰었지만 “작은 것에 상처받지 말라”던 한 언론계 선배의 조언을 곱씹으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는 이내 다시 전화를 걸더니 “온종일 기자들이 똑같은 질문만하고, 그때마다 당연한 대답들도 되풀이해야만 해서 답답해서 그랬다”고 해명하면서 사과했다. 그날은 ‘그래, 그쪽도 어지간히 고생이겠구’하며 헤프닝 정도로 넘겼지만, ‘도대체 전화가 무엇이길래’하는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때,  평소보다도 쉽게 무례해지는 것일까? 더 단단해져야겠지만, 전화 너머 상대방 태도에서 드러나는 그날의 기분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 좌우되고 있을 전국의 수많은 전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서. 이 사회가 수화기 너머까지 조금 더 섬세한 태도를 갖출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