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그 많은 자막은 누가 만드는 걸까
TV 속 그 많은 자막은 누가 만드는 걸까
  • 최은혜 기자
  • 승인 2019.05.03 07:21
  • 수정 2019.05.03 0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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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디자이너(후반 작업 자막팀)의 노동환경과 삶

[리포트] CG디자이너의 삶

자막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관객이나 시청자가 읽을 수 있도록 화면에 비쳐 보이는 글자를 말한다. 뉴스,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분야를 막론하고 방송에서 중요한 정보나 웃음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건 자막이다. 시청자는 자막을 통해 프로그램의 핵심 정보를 전달받고 극대화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자막을 디자인하고 완성된 영상에 입히는 작업은 제작팀이 아닌 후반 작업팀, 그 중에서도 CG 디자이너(Character Generator Designer)가 담당한다. 정보 자막, 말 자막, 재미 자막 등 자막의 종류에 따라 폰트, 간격, 크기, 디자인이 모두 바뀐다. 이런 문자발생 작업을 하는 게 CG 디자이너의 업무라고 요약할 수 있다.

‘CG 디자이너’라는 명칭 때문에 종종 CG 감독(Computer Graphics Director)으로 오인 받는다는 CG 디자이너 보미 씨(가명)와 미진 씨(가명)를 만나봤다.

상암동 방송가 밤풍경. ⓒ보미 씨

“CG 디자이너란 자막을 디자인하고
영상에 입력하는 일을 하는 직업”

보미 씨는 3년차, 미진 씨는 1년차 CG 디자이너다. 보미 씨는 “내 손을 거쳐 간 프로그램은 너무나 많지만 프로그램을 얘기하면 정체가 발각된다”며 웃었다. 미진 씨는 “주로 예능 자막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이들에게 CG 디자이너에 대해 소개해달라고 묻자, “자막을 프로그램의 성격, 상황에 맞게 디자인하고 영상에 자막을 입히는 일을 하는 직업”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막 내용을 고민하는 건 프로그램을 제작한 PD와 작가의 업무지만, PD와 작가가 고민해서 작성한 자막을 더욱 더 돋보이게 디자인하고 위치를 잡아 입력하는 건 CG 디자이너의 몫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얼마 전 MBC ‘라디오스타’의 사례처럼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을 편집해야 하는데 여러 이유로 편집이 어려울 때, 자막 위치를 조정해 가려주기도 한다. 보미 씨는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을 편집하거나 가릴 때 PD가 고생한다는 반응이 많지만 사실 고생은 우리 같은 후반 작업팀이 하는 것”이라며 “개떡같이 찍어도 찰떡같이 편집해주면 방송이 살아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졌다.

이렇듯 CG 디자이너는 대중에게 익숙한 직업은 아니다. 어떻게 해서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방송 일을 하면서 권유받았다”고 답했다. 미진 씨는 CG 디자이너를 하기 전, IPTV 사내방송국에서 4년 정도 영상편집 관련 일을 했다. 일주일에 2~3번 집에 들어갈 정도로 고된 편집 일로 방송을 그만두려고 결심했는데, CG 디자인 쪽에서 일하던 친구의 권유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CG 디자이너를 시작했다. 보미 씨 역시 몇 년 전 조연출로 방송계에 입문했다. 조연출 생활을 6개월 정도하다가 종합편집실(방송계에서는 종합편집실을 종편실이라 표현한다) 자막팀(CG 디자인팀은 자막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에서 일하던 친구의 권유로 CG 디자이너의 세계에 발을 담갔다.

매일이 대기의 연속, 노동 강도는 단연 최고(最高)

“가장 힘든 건 기다리는 것”이라고 밝힌 두 사람.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2~3시간은 기다릴 수 있지만 오늘 들어오기로 한 자막파일이 하루 이틀씩 늦어지는 건 너무 힘들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약속 시간에 자막파일이 안 들어와서 제작진에 전화를 하면 ‘한 시간 정도 늦어질 것 같아요’ 등의 답변이 돌아온단다. 기다리는 시간에 새로운 편집 툴을 익히거나 디자인을 구상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확한 출·퇴근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보미 씨는 “한 번은 아침에 출근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받으니까 퇴근하래요. 들어오기로 한 자막파일이 안 들어온 거죠.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가 저녁에 출근한 적도 있어요”라며 본인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진 씨 역시 “PD한테 자막파일을 넘겨받는 시간이 출근 시간이에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거나 휴무 날에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요”라며 웃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기다리는 퇴근 시간이 우리에겐 없다”고 단언한 두 사람은 “자막팀 일은 일의 경계가 없다”며 “내 분량이 끝났다고 퇴근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보통 한 팀에 프로그램 하나(한 회)가 들어오는데 내가 못하면 팀 내의 누군가는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분량이 완료돼도 방송 시간에 맞게 방송이 송출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완성되는 걸 봐야 퇴근할 수 있다.

방송 시간을 맞춰야 해서 노동 강도가 단연 최고(最高)란다. 보미 씨는 “작업량이 너무 많으면 화장실 가거나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채 자막을 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가장 바빴을 때는 한 사람이 하루에 A4 용지에 글자 크기 10포인트 기준 100장도 넘게 쳐봤다고 했다. 보미 씨는 그날의 기억에 대해 “정말 출근하자마자 앉아서 5시간 동안 A4 용지 86장 분량의 자막을 쳤다”며 “너무 힘들어서 좀 쉬었다가 다시 30장 넘는 분량의 자막을 치느라 손가락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미진 씨 역시 “근무 환경이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친구들한테 일주일치 회사 스케줄을 알려주면 이해 못하더라고요”라며 고된 노동 강도에 대해 토로했다. 어쩌다 자막파일이 2~3개가 한 번에 들어오면 어떤 걸 우선순위로 둬야할지 감이 안 잡히다보니 전쟁터가 따로 없다고도 했다.

두 사람은 “제작팀도 사정이 있겠지만 약속시간에 맞춰서 자막파일을 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제작팀이 자막파일을 주기로 한 약속시간에 따라 스케줄이 결정되는데 한 번 어긋나면 후반작업팀만 고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제작팀에서 자막파일을 늦게 주는 바람에 방송 송출을 하면서 종편을 하느라 손에 땀을 쥔 경험도 있다고 했다.

고된 노동 강도로 인해 CG 디자이너들의 노조를 설립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시도에 그쳤다. 평판에 따라 일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되는 방송계의 특성상 아무도 위원장으로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CG 디자이너들의 노동환경 개선 움직임은 시작도 못한 채 끝이 났다.

CG 디자이너의 노동 강도에 대한 실태조사는 여지껏 이뤄진 적이 없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 문의한 결과, “아직까지 후반 작업과 관련된 실태조사를 한 적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희망연대노조 역시 “방송 현장 스태프와 관련된 실태조사 자료는 있지만 CG 디자이너나 후반 작업팀에 대한 실태조사 자료는 없다”고 전했다.

CG 디자이너의 평균적인 노동 강도, 건강상태, 고용 형태 등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자료가 없는 것이다. 보미 씨와 미진 씨는 노조 설립 무산과 실태조사 자료의 부재를 CG 디자이너들의 처우나 노동환경 개선이 더딘 원인으로 꼽았다. ‘문제는 맞지만 다들 그렇게 사니까’라는 인식이 만연해지기 때문에 목소리를 쉽게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종편실 내부
종편실 내부

그럼에도 CG 디자이너의 길을 걷는 이유,
“스크롤에 올라가는 내 이름”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CG 디자이너를 계속 하는 이유는 뭘까? 보미 씨와 미진 씨는 CG 디자이너를 계속 하는 이유에 대해 “송출할 때 스크롤에 올라가는 내 이름을 보면 갑자기 뿌듯하고 보람차요”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솔직히 스크롤 아무도 안 보는 거 알지만 내가 보잖아요. 빠르게 올라가는 스크롤에서 내 이름 발견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라고 덧붙였다.

미진 씨는 “여러 시안 중 내가 디자인한 시안이 채택됐을 때 가장 뿌듯하다”며 “PD가 내가 작업한 자막 효과나 디자인에 대해 만족감을 표할 때 일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보미 씨는 “이 일을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크롤에 올라가는 내 이름을 발견할 때의 희열이지만,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에 투입될 때의 즐거움도 있다”며 “얼른 자막을 쳐서 완성본을 보고 싶다”는 열정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앞으로 CG 디자이너로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안타깝게도 미진 씨는 다음 달 퇴사를 끝으로 방송계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이미 전부터 방송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미련은 없다고 했다. 처우나 노동 환경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더 버틸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에 반해 보미 씨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방송국 본사 자막팀의 팀장이 되는 게 꿈”이라며 “아직은 연차가 낮지만 8년 정도 지나면 어디 큰 자막팀의 머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포부를 밝혔다.

방송계에 입문하려면 굳은 결심 있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CG 디자인 업계의 전망을 좋게 봤다. 두 사람은 “자막 없는 방송은 없다. 텔레비전뿐 아니라 유튜브, SNS 등에서도 자막을 활용한 콘텐츠를 생산하기 때문에 업계 전망은 밝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방송계를 떠날 예정인 미진 씨는 “예전에 비해 업무 환경이나 대우가 나아진 편이긴 하다”면서도 “주 52시간제 특례업종에서 방송업이 빠졌다지만 아직까지 현장은 주 52시간제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방송계의 과로사가 잠깐의 이슈로 치부되고 있다”며 “선배들이 이제 방송계에 입문하는 후배들을 위해 노동환경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보미 씨는 방송계에 입문하고 싶어 하는 예비 방송인을 위한 당부를 건넸다. “대부분 방송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고 오거나 연예인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서 온다”면서 “하지만 연예인 만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환상을 깨야 한다고 조언했다.

방송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밥을 거르거나 잠을 못자는 게 일상이고 워라밸(Work Life Balance, 일과 생활의 조화)이 엉망이기 때문에 강한 책임감과 ‘똑똑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미 씨는 “방송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버틸 수 없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는 말을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