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구속되지 않은 상태
[박완순의 얼글] 구속되지 않은 상태
  • 박완순 기자
  • 승인 2019.05.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지난 주는 파업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도 파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버스 파업이 예정됐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버스 파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버스 파업을 두고 ‘피하고, 막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런 말들을 보고 파업은 피하고 막아야할 것인지 궁금했다. 사실 우리 사회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상당히 부정적 단어로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당장 노동조합을 결성한다고만 해도 색깔 공세를 벌이고 전쟁을 치르듯 노동조합 결성을 막으려드는 사용자를 비롯한 세력들이 있는 현실에서 더욱 당연한 인식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더 공고하게 하는 것은 파업을 수단적 의미로만 바라보는 시각이다. 물론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을 멈춘다는 의미에서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단이라는 메시지가 힘을 얻는 순간 툭하면 파업 카드를 꺼낸다는 이야기와 ○○을 볼모로 삼는 협박용이라는 말로 파업이라는 단어는 둘러싸인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침해받았을 때 당당히 나의 존재를 밟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저항을 당연하게 여긴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본다면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 뻔하다. 즉,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에게 ‘구속된 상태’에 놓여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천부적으로 동의한다. 지금 세상이 그런 모습을 띄고 있다고도 믿는다. 파업도 결국 마찬가지다. 일터는 특수한 형태가 아니다. 인간들이 지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터 안의 인간인 노동자가 자신의 존재를 구속받는다면 ‘구속되지 않은 상태’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것도 당연해야 한다. 파업은 저항하는 인간의 증표고 자체로 인간의 증표와도 연관된다.

그럼에도 우리의 믿음은 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노동자로 바꿨을 때 희박해진다. 희박해진 믿음은 파업을 단순하게 수단으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믿음이 희박해지며 우리는 파업을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로 분리해서 본다. 파업을 불필요한, 과도한 노동자들의 욕심 가득한 행위로만 본다. 아마도 인간은 노동자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극소수임을 우리는 곧잘 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쉬운 망각은 우리 사회를 비극으로 이끌 수도 있다. ‘소유냐 존재냐’를 쓴 에리히 프롬은 19세기에는 신이 죽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20세기에는 인간이 죽었다가 문제라고 했다. 어쩌면 21세기에는 인간은 살았지만 노동자는 죽었고 그 둘이 같은 이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세기가 지날수록 점점 인간의 저항을 우리의 사회적 DNA에서 스스로가 지우려는 게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파업이 피하고 막아야하는 것으로 서술하는 한 말이다.

이럴수록 근원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리의 서술을 고칠 수 있다. 구속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우리의 모습을 계속 상상해보면 어떨까 싶다. 파업은 한 인간이 구속받지 않는 상태로 삶을 향유할 목적을 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