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
술잔은 비었는데 뭘로 채우나
No.2
술잔은 비었는데 뭘로 채우나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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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줄어드는 추세 속 일부에선 향락 문화 번져

가족과 함께 하는 새로운 여가 문화 만들어 갈 때

 

“.............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을 발표한 해가 1984년이다. 장시간 노동을 끝내고 ‘차가운 소주를 붓’던 노동자의 모습은 그 시대를 짊어져 왔던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자화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20년.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의 월급날이었던 6월 11일. 저녁 8시쯤 된 시간, 공장 앞 술집은 한산하다. 크고 작은 술집이 50여 곳 가량 늘어선 공장 앞 상가거리 중, 손님이 꽉 찬 곳은 겨우 서너 곳 남짓. 손님이 하나도 없는 술집도 몇 군데 눈에 띈다.
IMF 직전 10년 동안의 기아자동차 노동자 생활을 접고 소하리 공장 앞에 숯불구이 전문점을 연 송기형(37)씨의 가게는 겨우 한 테이블만 손님을 채우고 있었다. “월급날인데도 이상하게 손님이 뜸하네요. 하긴 주 5일제 되면서 금요일에 술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해요. 대부분 토요일에 가족들하고 야외에 나가니까 금요일엔 일찍들 들어가죠.”
그는 기아자동차 사원증이 곧 외상증서가 됐던 예전의 술 문화를 회상했다. “일 끝나고 나면 기숙사에서 선후배들 모아서 술 마시러 몰려 나가는 게 여가의 전부였죠. 그때야 스트레스 풀 게 오직 술밖에 없었던 때니까….” 그러나 변했단다. “요즘엔 달라요. 주 5일제 되면서 마시는 양도 많이 줄고, 마시는 요일도 금요일에서 월요일이나 화요일로 변했죠.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야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그의 말을 증명하듯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공장 앞 상가거리는 이미 파장 분위기다.

 

저녁 9시, 파장 분위기의 술집

2004년 한국사회 노동자를 들여다보기 위해 ‘술’이라는 소재를 택한 것은 술이 가장 일상적인 노동자의 여가문화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공장 주변의 술집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송씨의 가게뿐만 아니라 대공장 주변의 술집들에는 대부분 삼삼오오 조용히 술을 마시거나 1차로 일찍 자리를 파하고 각자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 많던 ‘술집의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노동자들에게 술이 곧 여가문화이고 놀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공단 주변을 따라 하나 둘씩 선술집과 주점, 포장마차가 생겨나고 그것은 공단 주변 상권과 노동자들만의 독특한 술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벌어지는 걸판진 술자리엔 고단한 일상의 한숨과 눈물, 웃음이 고스란히 안주가 되고 술이 됐다. 그러나 노동자의 여가가 지난 시절에 비해 확대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2001년부터 4조 3교대를 실시하고 있는 INI스틸 포항공장.
금요일 저녁, 포항시내에 노동자들이 비교적 많이 찾는다는 포장마차를 찾았지만 젊은 연인이나 가족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문화적 욕구를 해소해 주었던 술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취재팀과 동석한 노동조합의 김유호 문화부장(34)은 여가시간 확대에 비해 놀거리, 즐길거리가 없는 게 고민이라고 털어놓는다. “여기 포항도 마찬가지고 지방은 정말로 놀데가 없어요. 주말에 아이들 데리고 놀러 가려 해도 기껏 나가봤자 근교 바닷가가 전부고, 바다도 타지 사람들이나 좋지 우리는 맨날 보는 게 바다예요. 서울의 경우에는 문화나 복지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는데, 우리는 문화, 복지 면에서도 상당히 박탈감을 느끼죠.”

이재홍 홍보실장(39)이 말을 받는다. “그게 꼭 포항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어딜 가도 노동자들이 즐길 게 그렇게 많지 않을 걸요? 이건 개별 기업이나 노동조합이 손대기 어려운 부분도 많아요. 단지 노동자들의 여가문화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 문화 수준이 거기서 거기니까요.” 그는 노동자들의 여가문화 개발에 지역사회와 노조, 기업이 함께 나설 때가 됐다고 말한다.
우려스러운 것은 ‘노동자 문화’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음주문화는 더욱 자극적인 방식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민주노총이 각 직종별 노동자 566명을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노동자 문화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접대하는 이성을 동반한 노래방에 가 본 경험이 있다’는 답변이 전체의 40.7%를 차지했다.

실제로 지방의 한 화학업체 주변, 그리고 다른 지방의 조선업체 일대 등은 노래방이나 룸살롱 등의 ‘물이 좋기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향락 문화뿐만 아니라 소비, 퇴폐문화도 노동자들의 여가를 갉아먹고 있다.
지방의 한 화학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김모씨(41)는 “회사나 현장에서는 쉬쉬하지만 급여 압류 들어오는 경우가 적잖이 있고 그런 경우 대부분 도박 빚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말한다.
수도권 자동차 업체 최모씨(38)는 “일이 일찍 끝나면 팀을 이뤄 차를 빌려서 두시간 반 거리에 있는 지방 소도시로 간다. 유흥업소가 많으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마음껏 즐기다 온다”고 밝혔다.
노동자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늘었지만 그에 맞는 환경과 사회문화적 욕구의 분출구가 없는 탓이다.

 

새로운 대안 찾기, 지역과 노사가 함께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INI스틸 포항공장 노동조합의 시도는 새로운 대안찾기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지난해부터 노동자들의 가족생활을 위해 주말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공장 외곽에 노동조합이 직접 농지를 골라 조합원 1인당 6평씩 분양해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가족문화 장려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110가구의 참여로 출발한 이 프로그램은 올해에도 120여 가구가 참가하고 있을 정도로 호응이 높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가족과 여가까지 챙기는 것은 쉽지 않다. “걸리는 게 늘 비용이죠. 제대로 놀아본 경험이 없는 것도 문제고요. 회사에서 돈 많이 들여서 인기가수 부르고 선물 풀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순간적인 반응은 엄청 좋아요. 중요한건 ‘우리방식’인데 아이템도 부족하고, 경험도 많이 부족해요.”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 같은 경우에는 아이들에 초점을 맞춘다. 자녀들이 직접 생산 현장을 방문해 ‘아빠의 노동’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5일 근무제 도입에 따른 각종 조사와 연구는 ‘노동자들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 무분별한 음주문화가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을 이미 내놓은 바 있다. 공장 주변의 술집이 한산해 진 것은 단지 불경기 탓만은 아니라는 공장 주변 상가 주인들의 말은 이를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은 벅차 보인다. 여천의 한 노조 간부는 소비적 여가문화가 아니라 생산적인 놀이문화를 고민해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벽에 부딪친다고 말한다. 예전에 비해 술은 덜 마시지만 술로 풀었던 스트레스가 빠져나갈 다른 활로를 찾고 있지 못하다고 했다.

명지대학교 여가정보학과의 김정운 교수는 여가시간의 증대가 곧 여가의 질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김교수는 “변변한 가족문화, 여가문화가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시간만 늘면 모두가 그림 같은 전원주택에서 알콩달콩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라며 “여가 시간의 확대가 오히려 가족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노동자의 박탈감을 심화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여가시설 및 문화 컨텐츠 개발, 여가제도의 사회복지, 지역적 접근, 임금을 넘어서는 노동자의 삶의 질과 사회 문화적 욕구에 대한 우리 노사의 고민은 간 곳 없고 모두들 하루 더 놀면 행복할 것 같은 막연한 기대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여가시간 확대에 대한 우려와 기대. 그리고 눈에 띄게 줄어든 노동자들의 술자리. 알콜 기운을 빌어 터져 나오던 삶의 애환과 불만, 소박한 웃음들은 지금 어디서 탈출구를 찾고 있을까.
잔업이 없이 오후 5시면 전 공장이 조업을 마치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가정의 날’(매주 수요일). 이날도 가족과의 시간이 아니라 어김없이 친구들과의 저녁 술 약속이 잡혀있다는 이형재(37)씨는 “가정의 날이 아니라 가정 ‘파괴’의 날”이라며 허허 웃는다.
그의 공허한 웃음에 우리 노사와 지역사회가 함께 대답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높다.

 

노동자는 PC게임 중!
평소 즐기는 놀이 27.9%가 PC게임 꼽아
바둑-장기-화투 순…“없다” 38.7% 최고

민주노총이 지난해 발표한 ‘노동자 문화 실태조사 보고서’는 생산직·사무직을 막론하고 우리사회 노동자의 놀이·여가 문화가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조사는 다양한 항목 중 노동자의 여가활동 종류를 파악하기 위해 노동자가 즐기는 놀이, 레저·스포츠의 종류와 노래방 이용정도 등을 살폈다.
노동자가 즐기는 놀이가 있는지 여부를 살펴본 항목에서는 평소에
즐기는 놀이가 없다는 응답이 38.7%로 나타났고 조사 대상 중 여성의 56.0%가 평소에 즐기는 놀이가 없다고 답변, 여성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남성노동자보다 놀이문화 형성이 훨씬 저조했다. 직종별로 살펴보면 생산직의 경우 다른 직종에 비해 놀이를 즐기는 경향이 다소 높은 편이고 연령별로는 40대 이상이 20~30대에 비해 즐기는 놀이가 없는 편으로 나타났다. 또 미혼자 보다는 기혼자가 즐기는 놀이가 없는 경향을 나타냈다.

노동자들이 즐기는 놀이 종류로는 전반적으로 PC게임 27.9%, 바둑 12.2%, 기타 6.4%, 장기 5.6%, 화투 5.4%, 카드게임 3.8%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 1순위를 나타내는 PC게임의 경우 연령별로 구분해 볼 때 40대 이상의 집단을 제외하고 모든 집단에서 동일하게 1순위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음주횟수는 ‘일주일에 1~2번 마신다’는 답변이 51.3%로 가장 높았고, ‘한 달에 1~2번 마신다’는  28.9%, ‘일주일에 3~4번 마신다’는 13.6% 순으로 나타났다. 주종에도 변화가 있었다. 즐겨마시는 술 종류를 묻는 질문에는 맥주가 55.6%로 가장 선호도가 높았고, 그 다음은 소주 30.5%, 전통주 9.4%, 양주 3.5%, 막걸리 1.0%의 순으로 나타나 소주보다 맥주를 더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술 마시는 빈도가 줄고, 선호하는 주종도 도수가 낮은 술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성별과 연령, 소득과 직종을 떠나 모두가 PC 게임에 매달리는 게 우리 노동문화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