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잠과의 전쟁
[박완순의 얼글] 잠과의 전쟁
  • 박완순 기자
  • 승인 2019.06.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출근길 사람들로 빽빽한 지하철. 회기역 2-1번 승강장으로 몸을 비집고 타면 항상 보는 중년의 남성이 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코는 골지 않지만 항상 자고 있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소곤소곤 통화를 하는 사람, 책을 보고 있는 사람, 빽빽한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지 못해 위태위태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의 모습은 숭고하고 처연하다. 잠과의 전쟁에서 완벽한 패배를 받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빽빽한 지하철에서 잠을 편하게 자기란 생각보다 힘들다. 우선 자리에 앉지 못할 확률이 높다.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서서 잠을 자는 건 균형 감각이 뛰어난 체조 선수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설사 앉더라도 넋을 잠에게 내주고 잔다는 것은 옆의 사람에게 내 머리와 몸이 닿아 다른 사람이 놀라는 상황을 감내할 심적 여유까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허리를 접고 고개를 숙인 채 불편한 자세로 잔다.

그 남자는 어떻게 그리 편히 잘 수 있을까. 나름대로 추측해봤다. 아마도 사람이 덜 붐비고 자리가 넉넉한 역에서 탔을 확률이 높다. 그래야 앉을 수 있다. 편히 잠에 잠식당할 자세를 취할 수도 있다. 그리고 꽤나 본인의 목적지가 멀 확률이 높다. 그래야 마음 놓고 잘 수 있다. 거리가 멀지 않았다면 깊은 잠은 포기하고 선잠에서 귀는 지하철 방송에 집중해야 한다. 실제로 내 추측은 그 남자의 상황과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나는 경의중앙선을 타고 회기역에서 홍대입구역까지 간다.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거리인데, 그 남자는 항상 나보다 먼저 탄다. 경의중앙선의 시작 부근에서 탈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홍대입구역 전전인 공덕역에서 내린다.

그 남자가 장렬히 잠에 전사한 모습을 보고 내 시야를 줌아웃 하며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그 남자는 어떻게 그리 편히 잘 수 있을까에 대한 근원적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모두들 짜증이 가미된 무표정이었다.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시위라도 하는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 남자는 잠에 완전히 잠식당해 해탈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근원적 이유는 어제의 노동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일수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스트레스일수도, 생각보다 일찍 퇴근했음에도 높은 집값 때문에 외곽에 집을 구해 출퇴근 거리가 멀어서 일수도. 어제의 노동과 관계한 모든 일들 때문이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 했다. 그 남자가 몸으로 받아들였던 어제의 노동은 잠과의 전쟁에서 잠의 지원군이었을 터이다.

굳이 통계 수치를 나열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잠이 부족한지 알 것이다. 그 연유로 직장인들은 장시간 노동과 먼 출퇴근 거리를 꼽는 것도 굳이 세세한 통계 자료를 펼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출퇴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지도 구체적인 조사 결과를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무엇보다도 잠만 부족한 게 아니다. 잠만이라도 자야하니 내가 휴식을 취할, 내 삶을 영위할 시간이 부족하다. 잠만으로는 보상받을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여유롭게 차를 마신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소설을 읽는다든지, 친한 친구를 만난다든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다든지. 오죽하면 퇴근하고 잠만 자게 되는 시간이 아까워서 몸이 피곤한데도 놀다가 잔다는 이들이 많을까.

이런 생각들의 연속에서 갑자기 그 남자의 숭고한 표정이 떠올랐다. 잠과의 전쟁에서 장렬히 패배했지만 그렇게 숭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젯밤 몸이 피곤한데도 놀다가 잤기 때문인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말. 졌잘싸. 졌지만 잘 싸웠다.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잠에게 졌지만 어제 그 남자는 충분히 즐겼기에 잘 싸운 것. 물론 우리의 현실은 잠과의 전쟁에서 승리의 역사를 쓰기에 역부족하다. 분명히 개선돼야 할 현실은 선명하게 존재한다. 선명한 현실은 너무나 단단하고 거대하기에 야금야금 무너뜨려야 한다. 야금야금의 과정이 지난해 지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해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퇴근길에 오를 것이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좀이라도 놀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컴컴한 밤, 침대 위에서 외칠 것이다. 졌잘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