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솜의 다솜] '도를 아십니까'의 원동력
[정다솜의 다솜] '도를 아십니까'의 원동력
  • 정다솜 기자
  • 승인 2019.07.08 09:13
  • 수정 2019.11.21 17: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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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사랑의 옛말. 자꾸 떠오르고 생각나는 사랑 같은 글을 쓰겠습니다.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정다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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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역에서 사당역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립니다. 길 중앙엔 8차선 도로가, 양옆엔 보도가 나 있죠. 해가 지기 시작하면 주로 오른쪽 보도 위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일명 '도를 아십니까', 포교활동을 하는 분입니다. 저는 그분을 5년째,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마주칩니다. 단정한 옷차림에 머리는 아래로 질끈 묶은 아주머니는 저를 볼 때마다 처음처럼 묻습니다. "얼굴에 복이 많으시네요?" 눈빛과 낯빛 어디에도 감정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은 사람 같지는 않죠. 그 묘한 기운을 뒤로 한 채 걷다 보면 궁금해집니다. 길 위에서 끊임없이 거절당하는 아주머니는 대체 어떤 힘으로 다시, 또다시 그 길 위에 설 수 있는 건지요.

원동력은 '거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계속 거절만 당하다 보면 변합니다. 처음엔 '내가 왜, 무엇이 문제길래 거절당하는 거지?' 성찰하겠죠. 그렇지만 거절이 반복되면 '이렇게까지 거절당하는 걸 보니 세상이 날 몰라주는 거네'로 사고 회로가 바뀝니다. 자아는 비대해지고 거절에 무감해집니다. 저는 이 메커니즘이 지금 '극단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대접만 받던 백인 남성이, 캠퍼스를 나오자마자 사회에서 거절을 당하는 청년이, 노동만으로 풍족한 삶을 영위했던 미국 러스트벨트 노동자가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세상이 잘못됐다는 강한 신념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 진실이나 사실보다 신념과 감정이 더 중요한 '탈진실'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럽의 극우 정당은, 영국의 브렉시트는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가짜뉴스가 횡행했습니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에서 '자유대한' '종북타파' '반공' 등을 외치며 황혼의 열정으로 길 위에 서는 노인 분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에게 진실과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 10명 중 9명이 CNN보다 트럼프의 말을 믿는 현실에서 진실을 수호하겠다는 언론이 점점 설 자리를 잃는 수순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다시 사당역 도를 아십니까 아주머니를 떠올려 봅니다. 길 위에서 거절만 당하는 아주머니처럼, 저는 거절당하기가 일상인 노동자들과 자주 만나는 기자입니다. 기자증을 받은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억울하고 절박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매일같이 쏟아집니다. 노동자들은 대책도 없이 갑자기 해고되고, 원청의 감독과 지시를 받지만 소사장으로 계약 '당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대책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용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바쁩니다. 자꾸 거절당하는 노동자들은 길 위에 섭니다.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칩니다. 단식과 삭발이 이어집니다. 생을 걸며 굴뚝에도 오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노동자의 사고 회로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거절만 당하다 보면 분노로 가득 차고 대화와 타협은 요원해지겠지요.

이 지점에서 기자의 역할을 생각합니다. 탈진실의 시대에 기자의 설 자리가 좁아진다지만 기자는 극단을 막는 데 일조할 수도 있습니다. 기자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대화의 전제인 균형감을 갖춘 차분한 언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삭발이나 굴뚝을 택하기 전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함으로써 문제의 책임 주체에게 해결을 촉구하는 일도 가능하겠지요. 

"저번에 만난 홀애빕니다." 주말 오후, 톨게이트 해고 노동자 윤서구 씨에게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윤서구 씨는 한국도로공사가 자회사를 설립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정규직 전환 방안에 거부하며 해고됐습니다. 저는 청와대 앞에서 농성 중인 그의 사연을 기사로 썼습니다. 그는 숱한 외침에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던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 전해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 일은 묻고 들은 일밖에 없습니다. 묻고 듣는 일로 누군가 극단을 선택하는 일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지난 주보다 더 먼저 묻고 더더 많이 듣겠습니다. 다시 월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