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교섭 거품을 빼라
임금 교섭 거품을 빼라
  • 승인 2005.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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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제시안 하늘 땅 차이, 파업은 통과의례?

인상 기준 공유 못해 항상 힘 대결로 결판나


매년 5월이 되면 각 기업의 노사는 임금협상에 나선다. 한달 안에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 대기업에서는 석 달을 넘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임금협상이 석 달씩이나 지속되는 경우 대부분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거쳐 파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턱없이 길어지는 임금협상, 매년 소요되는 갈등 비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365일 중 100일은 임금교섭 중
지난해 6월 초 임금교섭 상견례를 시작해 9월 중순에야 조인식에 골인한 울산소재 정유업체 S사의 사례를 보자.
1차 교섭에서 노조가 요구한 임금인상률은 10.5%, 회사는 제시안을 내지 않았다. 3차 교섭에서 회사는 ‘임금동결’을 주장했고 10차 교섭까지 별다른 진전 없이 쟁의조정신청까지 가는 힘겨루기만 계속됐다.


다시 교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회사측이 실질적인 인상안(4%)을 제시한 11차 교섭 이후부터다. 12차 교섭에서 노동조합은 5%의 수정요구를 제출했고, 회사는 4%를 고수했다. 노사는 13차 교섭에 가서 4.7% 인상에 합의, 잠정 합의안에 서명한다.


잠정합의안이 나온 후의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마지막 교섭에서 최종 타결까지 걸린 시간은 열흘. 회사측 첫 제시안이 나온 11차교섭(8월 24일)부터 조인식(9월 17일)까지는 채 한 달이 안 걸렸다.


일반적으로 노사의 임금협상은 △교섭준비 △본교섭 △막후교섭 △찬반투표 및 사후관리 순으로 진행되는데, S사의 사례에서처럼 막후교섭과 찬반투표에 비해 본교섭 기간이 지나치게 긴 것이 일반적이다. S사와 동종업계인 H사의 최근 3년간 총 교섭차수와 회사측 1차안 제시 차수를 비교해 보면 비슷한 패턴이 드러난다. 2002년 총 15차 교섭 중 회사의 첫 제시안이 11차에 있었다. 2003년에는 총 13차 교섭 중 10차, 2004년에는 총 11차 교섭 중 9차에 회사측 제시안이 나왔다. 회사측 제시안이 나온 후 최종 타결까지는 평균교섭 회수 2회, 20일이 못되는 시간이 걸렸지만 지난 3년간의 평균 교섭일수는 90여일에 달했다.

 

먼지만 쌓여가는 교섭자료
그렇다면 막후교섭과 찬반투표 전, 짧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두세 달까지 노사는 무엇을 할까. 교섭 전 과정을 살펴보면 낭비요소가 쉽게 발견된다.


S사의 인사팀 관계자는 교섭자료 준비와 노조 제안설명, 회사의 경영설명회가 이뤄지는 교섭준비 단계부터 지나치게 형식적이라고 지적한다. “노조가 연초부터 각종 근거를 수집해 수십 장짜리 교섭자료를 만들어 내고, 회사도 나름대로 경영성과를 종합해 설명회를 하지만 노사 모두 제안의 근거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어차피 논리적 근거가 아니라 힘 싸움으로 결론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대의 기준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눈치 보기에 열을 올리죠” 이 관계자의 말처럼 노조의 제안에는 경영성과, 물가인상률, 표준생계비, 조합원여론 등이 근거로 제시되지만 매년 임금인상안은 사업장마다 거의 비슷하다. 이는 각 기업 노조가 상급단체에서 제시하는 임금인상지침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회사는 경영설명회 외에는 제안 자체를 하지 않는다. 임단협 때마다 노조 유인물에서 회사의 불성실 교섭을 규탄하는 문구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파업은 통과의례?
본교섭이 시작되면 노사는 본격적 ‘기싸움’에 들어간다. 지난해 87일만에 임금협상이 타결된 충북소재 전자업체 A사의 작년 교섭 일지를 보면 임금인상 근거에 대한 토론보다는 말꼬리 잡기와 특정 교섭위원에 대한 비난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이것도 안이냐”, “지금 노조를 무시하는 거냐”, “회사생활 꼬이기 싫으면 말조심해라”. “꼬투리 잡지 말라”는 등의 말부터 심지어는 욕설이 오가기도 했다.

 

이 회사의 한 교섭위원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1년 내내 찍히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허심탄회한 토론보다는 ‘말조심’과 ‘정치력’이 동원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은 회사측의 1차 제시안이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이 과정이 길어지거나 협상이 전혀 진전이 없는 노조에서는 이 때 파업 찬반투표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파업과 임금인상률의 상관관계는 크게 찾아보기 어렵다. A사의 경우 2001년에는 조합원 76%의 찬성으로 3일간, 2002년과 2003년에는 80%가 넘는 찬성으로 각각 4, 7일간 파업을 했지만 실제 노조 제시안 대비 타결율은 57% 내외로 파업을 안한 해와 차이가 없었다.


파업이 교섭의 ‘최후수단’보다는 ‘통과의례’ 성격이 짙다는 뜻이다. 이 회사 노조간부는 “임금교섭 기간의 파업은 회사와 조합원 모두에게 조합의 힘을 보여준다는 뜻이 더 강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 놓는다.


이런 일이 일상화되다 보니 회사도 노조의 파업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회사 노사협력팀의 김모 차장은 “노조가 파업을 하면 이제 교섭이 끝날 때가 다 됐구나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노조의 파업에 회사가 인상안 제시로 화답하고, 노조가 못이기는 척 협상 테이블로 복귀를 하면 ‘그림 좋게’ 협상이 마무리된다는 것.

 

비공식 라인 통한 타결 시도 판쳐
파업 등이 마무리 되고 회사가 인상안을 제시하면서부터는 공식적 협상보다 비공식 라인의 가동이 활발해 진다. 노사 모두 최종 복안을 가지고 조합원의 여론 살피기와 서로 ‘주고받을’ 사안의 리스트 작성에 나서는 것이다. 이 때에도 교섭테이블은 계속 가동되지만 최종 인상안은 노동조합위원장과 CEO 간의 ‘핫라인’을 통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경기도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업체 C사의 노사협력팀 김모 대리. 노사협력팀 발령 이후 처음으로 맞는 임금교섭에서 그는 노동조합보다는 회사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임원들의 지시에 따라 직원의 여론을 파악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대응 자료를 만드느라 며칠 밤을 지새웠던 김 대리는 나중에야 노조위원장과 CEO간의 전화 한통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더 이상 임금협상 기간이 와도 논리적 근거를 만드느라 애쓰지 않죠. 조합원들 분위기나 파악해서 보고하고 현장 여론 조성을 위해 소문도 좀 만들고 그러다 보면 ‘장’들 끼리 만나서 다 ‘쇼부’를 보니까요.” 김대리는 이 때에는 모든 정보가 ‘윗선’으로 집중되기 때문에  교섭위원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최종 협상안이 만들어지고 나면 노사모두 현장 여론 파악에 나선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대충 올해는 몇% 인상할 것이라는 내용을 현장에 흘리면서 분위기를 본다”고 말했다.
최종 찬반투표에 이르기까지는 이렇게 공식적 협상보다는 비공식적 과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 노사 모두의 전언이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임금교섭이 끝나지만 이때부터 또 다른 협상이 시작된다. 교섭시에 합의한 임금 인상의 시기와 적용범위, 형태 등으로 놓고 각종 실무위원회가 가동되기 때문이다. 실무위원회는 말 그대로 노사간 합의 사항을 적용하기 위한 ‘실무’를 다루는 곳인데 실제로는 새로운 협상에 가깝다. 세부적 시행 절차에 대한 이견은 물론이고 임단협에서 합의한 사항에 대한 노사의 해석이 달라 이행을 거부하거나 지체하는 일이 빈번한 것. 심한 경우 임단협 파기에 대한 노사간 고소고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1년 내내 교섭만 한다’는 현장 노사의 푸념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노동교육원 최영우 교수는 “임금협상의 쟁점이 실무위원회에서 고스란히 다시 논의되거나 번복되는 행태가 노사간 불신을 더욱 키운다”며 “신뢰는 합의가 아니라 이행을 통해 싹튼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勞 정치논리, 使 경제논리 충돌 
기업 단위 임금협상이 지나친 낭비와 힘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노사가 공유할 수 있는 합리적 임금인상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노동부가 발간한 ‘임금교섭 참고자료집’에 따르면 임금인상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에 관해 사용자는 ‘기업의 지불능력’을 1순위로 꼽고 있는데 반해 노동조합은 ‘물가상승률’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노동혁신연구소 조자명 부소장은 “기업에 따라 지불능력, 순이익, 매출액 등 임금인상 기준이 모두 다르지만 노동조합과 공유하는 합리적 기준 없이 매년 논리가 바뀌고, 노조도 개별 기업의 경영성과와는 무관하게 상급단체의 요구율을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애초부터 합리적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회사는 지불능력을, 노조는 상급단체 인상기준과 조합원 여론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어 개별 기업의 실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매번 임금교섭은 힘의 논리로 빠져들게 된다.


회사가 직원을 설득할 만한 임금결정 기준 없이 매번 경영환경이 어렵다는 카드를 꺼내는 것도 문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떼쓰는 게 상책’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자동차업체 K사의 노사협력팀 임원은 “회사가 정말 어려워서 임금을 올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해도 노동조합 간부는 물론, 조합원들이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경우가 없다”며 오랜 동안 굳어진 교섭 관행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매년 협상에서 회사가 버릇처럼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결국 막판에 가서는 얼마가 됐든 인상으로 결론이 나기 때문에 조합원들 사이에서 ‘어차피 줄 거 맨날 우는 소리 하지 말고 알아서 주면 얼마나 좋냐’는 불만이 팽배하다는 것.


노조의 요구안과 회사측 제시안이 적게는 5% 내외부터 많게는 10%까지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차피 졸라서 받아내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세게 나가야 한다’는 심리가 반영되는 것이다. 결국 임금협상이 반복될수록 노사간의 불신이 커지고 기존의 관행이 굳어지고 있다.


노사 모두 조합원을 설득할 합리적 기준을 마련하고 과도한 정치논리의 ‘거품’을 빼지 않으면 임금교섭을 둘러싼 갈등 결국 고스란히 노사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