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이 선택한 영화, '기생충'도 주52시간 지켰다
칸이 선택한 영화, '기생충'도 주52시간 지켰다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9.07.11 04:21
  • 수정 2019.07.11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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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현장 어떻게 달라졌나?

[인터뷰]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 

동의도 없이 밤새워 일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하면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까?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영화산업노조) 위원장이 노동조합을 시작한 계기는 간단했다. 일터인 영화제작 현장을 바꾸고 싶어서. 그는 2001년부터 현장에 있었다. 촬영팀에서 배우의 움직임이나 장면에 따라 초점을 맞추는 포커스풀러(Focus puller)로 일했다. 그러다 2015년 위원장이 됐고, 영화 현장은 그가 세 차례 연임하는 동안 “빨리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될 정도로 바뀌었다.

변화의 중심엔 영화산업노조가 있었다. 특히 2014년 10월 CJ ENM, 쇼박스 등 국내 주요 영화 투자 배급사와 함께 맺은 노사정이행협약이 중요한 변환점이 됐다. 당시 노사정이행협약에는 노동조합과 투자사를 비롯한 (사)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등 제작사, 정부 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등이 참여했다. 노사정이행협약은 영화 투자와 제작 시 4대 보험과 표준근로계약서를 의무적으로 적용하고, 표준임금 가이드라인 적용, 임금체불 제작사 및 관련자에 대한 투자, 배급, 상영 금지 등을 뼈대로 한다. 근로시간, 연장근무, 4대 보험 가입 등 근로기준법을 준용(準用)하고 있는 표준근로계약서는 같은 해 12월 개봉된 ‘국제시장’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빠른 속도로 뿌리내렸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영화 63편 중 77.8%(49편)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사용했다. 칸이 선택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더는 ‘영화를 한다’는 것이 핑계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지켜봐온 안병호 위원장의 감회는 어떨까?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 스태프들의 일상에는 어떤 변화를 불러 일으켰을까? 지난 6월 중순 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영화산업노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통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봤나? 스태프들과 표준근로계약을 맺고 근로기준법을 지켜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영화 스태프들의 근무 시간을 제한하면 ‘감독의 창작을 방해해서 결국 영화의 질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기생충>을 계기로 ‘이제는 영화 현장에서도 주 52시간제를 적용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영화 결과물과도 크게 상관이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본다. 하지만 <기생충> 이전에도 많은 영화들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써왔기 때문에 한편으론 노동조합으로서 대중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리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컸다.

평점을 매긴다면?

흥미롭게 봤다. 어느 정도 대중성을 갖추면서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평점을 매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웃음). 평소에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재밌게 봐왔다. 영화도 잘 만들고 시각적으로도 잘 구현한다.

영화를 자주 보나.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본다.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조합원들이 참여한 영화가 궁금하기도 하고, 현장에 안 간 지 오래 돼서 일부러라도 본다. 개봉하는 한국 상업 영화(현장) 대부분에 조합원들이 있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으로 무엇이 크게 바뀌었나.

노동시간이 주 52시간 또는 60시간으로 구체적인 범주로 줄었다. 요새는 주 4.5일, 하루 12시간 이내로 촬영을 한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스태프들은 주 5.5일, 하루 17~18시간씩 일을 했다. 밤샘도 잦았다. 스태프들의 노동시간은 감독의 ‘오케이 컷’에 따라 바로 줄거나 늘었다. 감독이 스태프들의 피로를 감지해서 ‘오늘은 이만 찍어야겠다’고 판단하는 식이었다.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감독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이란 ‘시스템’으로 통제된다. 감독들도 어느 정도 순응하는 분위기다.

임금은 어떤가?

임금도 200만 원 중반 수준으로 올랐다. 이전에는 임금을 ‘계약금-잔금’ 또는 ‘계약금-중도금-잔금’식으로 두 번이나 세 번 쪼개서 받았다. 마지막에 받는 잔금은 영화가 끝난 다음에야 받는 구조여서 체불이 많았다. 촬영 시간이 워낙 길어서 최저임금이 3,000원, 5,000원 하던 시절에도 시간당 600원, 조금 많으면 1,000원을 받았다. 지금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시간당 임금이 최저임금으로 고정돼 있고 연장수당, 야간근로, 휴일수당 등 추가 노동시간에 대한 월급을 받고 있다.

임금이 늘었다기보다는 이제야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된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조수 스태프 중에도 결혼하시는 분들이 생겼다.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일이었다. 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생계를 포기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조수 스태프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어떻게?

예전에는 조수 스태프가 헤드 스태프나 감독이 되기 전에 ‘거쳐 가는 과정’ 정도로 인식됐다면 이제는 하나의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감독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감독 혼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거에는 조수 스태프 대부분이 돈이 되지 않아서 감독이나 촬영감독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휴일과 실업급여가 현실이 되다

다른 변화가 있다면?

휴일이 생기고 다음 영화를 알아보는 동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예전에는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스태프들이 하는 일종의 절차가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면 3~4달 동안 친구들을 만날 수 없으니 미리 한꺼번에 만나둬서 ‘한동안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다 영화가 끝난 뒤에야 다시 보곤 했다.

제작자 입장에선 이전보다 비용이 크게 늘었을 것 같다. 그런데도 표준근로계약서가 잘 이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작사들은 근로기준법을 지켜야 한다는 데 동의를 해도 ‘돈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투자사들의 힘을 빌렸다. 주요 투자 배급사인 CJ ENM과 쇼박스가 노사정협의회에 당사자로 참여했고, 이들의 ‘워딩(Wording, 생각이나 주장의 표현)’으로 제작사들이 움직였다. 투자사들도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영화 현장을 바꾸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시작이 관성적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비상식적인 영화사, 제작사가 됐다. 투자사들의 투자가 고예산 영화에 편재되는 측면도 있다. 투자사들이 임금에 대한 비용이 느니까 차라리 예산을 조금 더 키워서 ‘와이드릴리즈(Wide release, 개봉 때 최대한 극장 수를 많이 확보하는 배급)’나 볼거리를 만들어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자는 식이 되는 거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순기능이 있지만 투자하는 영화 수가 줄 수 있기 때문에 현장의 수가 늘지 않을 수 있다. 장르적으로도 한쪽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다. 투입되는 예산에 따라 현장 간의 격차가 발생할 수도 있다.

저예산 영화들은 여전히 어렵다고 들었다.

저예산 영화들은 애초부터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전제한다. 요즘은 평균 제작비가 50억 원대로 올라서 그보다 적으면 저예산 영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영진위는 10억 미만 영화를 저예산 영화로 본다. 하지만 근로기준법과 예산, 사람들이 피곤을 느끼는 정도는 별개의 문제다. 모든 영화 현장에 적용되는 것이 맞다. 문화체육관광부나 영진위가 지원하는 독립영화 중에서도 노동조건을 지키지 않는 곳이 많다. 지원을 받을 때 표준근로계약서를 사용하는 제작사를 우대하지만 다음에 작성 여부만 유선 상으로 확인하는 정도다. 실제로 잘 지켜지고 있는지 현장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지난해 8월부터 제작사별로 개별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이전에는 사측 교섭단(PGK-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한국영화제작가협회)과 산업별 통일 교섭을 했다. 지금까지 2개 회사와 교섭을 체결했고, 11개 회사와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제작사들에 같은 수준의 교섭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표준근로계약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준근로계약서가 근로기준법을 준용하고 있지만 계약서 자체가 법은 아니기 때문에 법 안으로 넣는 과정인 셈이다. 개별적인 교섭으로 공통의 것을 만드는 것. 그것이 노동조합의 목표다. 단체협약을 2년마다 맺기 때문에 이후에는 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는 경력자 임금 가이드라인이나 촬영 준비팀의 인력 증원을 위해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 스태프 한 분이 ‘이제는 다 좋으니까 굳이 노동조합이 필요하냐’는 말을 했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금방이다. 그렇게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노동조합으로 한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영화산업노동조합 회의실 벽면 걸려 있는 대형 화이트보드엔 조합원들이 촬영하고 있는 영화 목록들이 주욱 적혀 있다 영. 화산업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약900명이 며 대부분 영화 스태프들이다.
영화산업노동조합 회의실 벽면 걸려 있는 대형 화이트보드엔 조합원들이 촬영하고 있는 영화 목록들이 주욱 적혀 있다. 영화산업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약900명이 며 대부분 영화 스태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