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인간에 대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박완순의 얼글] 인간에 대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 박완순 기자
  • 승인 2019.07.17 07:49
  • 수정 2019.07.1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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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 정도면 칼럼 이름을 바꿀까 싶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반추하고 짜깁기해 쓰고 있으니 말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나온 내용이 요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과 맞물렸다. 쓸 데 없이 변명이 길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책은 심보선 작가가 쓴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이다. 심보선 작가가 생각하는 바를 짤막하지만 밀도 있게 내려 쓴 70편 이상의 산문으로 엮인 책이다. 그 중 세 편의 산문에 눈길이 갔다. ‘권력과 인격’, ‘악을 생각하다’, ‘선과 악의 평범성’이다. 다른 것들도 상당히 눈길이 갔지만, 특히나 그 세 편을 다시 읽고 또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행되는 어떤 법 때문이다. 그 어떤 법은 16일에 시행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다.

'그 어떤 법'인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두고 말이 많다. 여러 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한 직장 내 괴롭힘을 이제야 근절할 수 있겠다며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며 사소한 것도 법에 걸릴까 몸을 사리게 되고 조직문화 경색과 조직공동체 분해로 갈 수도 있다며 근심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심보선 작가의 ‘권력과 인격’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인격을 침해한 이들로부터 종종 “고의가 아니었다”라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법원에서는 ‘고의성 여부’가 죄질을 판단하는 데 주요 준거가 된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고 행해지는 인격 침해야말로 더욱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음은 마음속에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감이 애초부터 결여되었다는 사실, 타인의 인격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물로 당연시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실은 “당신의 인격이 그토록 중요한지 몰랐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큰 모욕감을 불러일으킨다.

심보선 작가의 ‘악을 생각하다’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깊이 생각하지 못함’이라는 평범한 오류에서 발생한다. …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이란,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결국 악이란 ‘망각을 선택함’이고 지옥이란 거듭된 망각 끝에 다다르는 종착지의 이름이다.

짜깁기의 결론은 이렇다.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는 발언의 기저에는 ‘고의성이 없는데?’라는 놀라울 만큼 '순백'의 질문이 깔려있다. 심보선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의 인격이 그토록 중요하지 몰랐다’는 순백의 질문 말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깊이 생각하지 못함’이라는 평범한 오류 때문이다. 평범한 오류의 습관화는 ‘망각을 선택함’으로 이어진다. ‘나도 가지고 있는 당신의 평범하고 당연한 인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라는 고백 아닌 고백으로 끝이 난다. 개개인의 인권이 가꾸어질 여력 없는 순간들이 오히려 공동체를, 조직을 와해하는 것이지 않을까.

물론 깊고 넓은 사유가 힘들다. 개별 인간 존재가 행하기에 벅찬 일일 수 있는데, 행하기 벅찬 이유는 개별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한 말들로 표현되는 우리가 살아온 사회에서 받아온 교육,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관습과 문화, 출구 없는 토너먼트 게임에 우리를 내모는 구조들. 도저히 깊고 넓은 사유가 가능한 틈은 없다.

그렇다면 법으로라도 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슬픈 현실이지만 적어도 법 앞에서 오래 동안 잊었던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유하고, 주변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로 나눈다는 큰 진전이다.

심보선 작가의 ‘선과 악의 평범성’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청문회에서 잠수사들의 말을 어눌했다. 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나온 말이다. … 팽목항의 잠수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선행이란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필연적인 행동이었다. 포겔만이 자신의 책에서 제시한 개념은 바로 ‘선의 평범성’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에바 포겔만이라는 학자가 연구한 나치 치하에서 어려움에 처한 타인들을 도와준 사람들이다. 물론 나치와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아주 악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도 평범한 선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근원에 심보선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함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작됐다. 사유도 시작됐다. 심보선 작가는 사유의 시작에 단초를 제공했다. ‘권력과 인격’에서 그는 “인격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자신과 타인을 향해 가꾸고 유지하는 ‘사람다움’이다”라고 디딤돌을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