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혜의 온기] 닥터탐정의 추모방식
[최은혜의 온기] 닥터탐정의 추모방식
  • 최은혜 기자
  • 승인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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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記 따뜻한 글. 언제나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최은혜기자 ehchoi@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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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일이다. 주말 오후, 약속이 있어서 나가던 길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습한 날씨와 빠듯할 것 같은 약속시간에 짜증이 살짝 솟아 있었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작은 비석 앞에 한 남자가 하얀 꽃이 잔뜩 꽂힌 꽃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그냥 서있었다.

작은 비석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비석인지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평소에 보이지 않던 비석이 눈에 들어와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었다. 그 작은 비석의 주인은 故 장세환 씨. ‘소매치기를 당한 시민을 돕기 위해 범인을 뒤쫓다 자신을 희생한 그의 의로움을 이곳에 기림’이라는 비석의 글귀와 함께 눈에 들어온 것은 ‘2003’이라는 숫자였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 비석이었던 것이다.

이 ‘의인 장세환 추모비’를 자세히 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작은 비석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얀 꽃바구니를 내려놓고 서있는 남자가 신기하고도 생경했다. 약속시간도 잊은 채 그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참을 서있던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기자를 쳐다봤다. 깜짝 놀라 시선을 거두고 발길을 옮겼다. 그는 20년 가까이 된 비석 앞에서 故 장세환을 추모하고 있었다.

얼마 전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드라마가 방영됐다. SBS의 <닥터탐정>이 그것이다. 산업현장의 사회 부조리를 담았다는 이 드라마의 첫 주는 스크린도어를 점검하는 하랑이의 죽음에 대한 얘기였다. 대기업 TL메트로의 하청에서 스크린도어를 점검하던 하랑이는 유해물질 중독으로 손에 힘이 풀려 선로로 떨어졌다. 하랑이가 죽은 역은 부이역. 2016년의 구의역이 생각났다.

드라마 속 하랑이는 조금만 더 버티면 TL메트로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 채 일했다. 하랑이의 엄마는 하랑이가 TL그룹의 정규직으로 입사한 줄 알고 있다가 생때같은 아들을 한 순간에 잃었다. 아들이 죽은 후 엄마는 “누구나 힘들지만 참고 일한다”고 말했다고 자책했다.

하랑이가 죽던 순간, 선로로 떨어지던 하랑이를 붙잡았던 동료. 그 역시 유해물질에 중독돼 손에 힘이 빠져 하랑이를 끝까지 당기지 못했다. 노조활동을 하던 동료와 하랑이가 마지막으로 한 통화는 “아무리 노조를 해도 회사는 바뀌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 죽으면 바뀔까 자조하던 하랑이는 그렇게 부이역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세상에 공개된 하랑이와 동료의 통화내용을 들었던 하랑이의 동기는 “우리도 살고 싶다”고 울었다. 드라마를 보던 기자도 같이 울었다.

첫 주차 드라마 말미, 에필로그로 나온 것은 2016년 구의역 김군에 대한 얘기였다. 최소한의 안전 수칙인 2인 1조의 원칙이 지켜지지 못한 현장에서 제대로 된 밥조차 먹지 못한 그의 마지막 하루. 구의역 김군의 3주기 추모제 영상에 깔린 드라마 주인공의 나레이션은 “노동현장에서의 죽음이 결코 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리고 간 청년. 우리는 그를 구의역 김군이라 부릅니다”로 끝이 났다.

<닥터탐정>의 추모방식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직관적이었다. 사건의 핵심을 관통하면서 드라마를 시청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구의역 김군의 사고를 다시금 상기시켰다. 그리고 모든 노동현장에서의 죽음을 상기시켰다. 대사를 통해 ‘노동현장에서 더 이상 구의역 김군이 나오면 안 된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드라마를 시청한 대부분의 시청자는 ‘노동현장에서 더 이상 구의역 김군이 나오면 안 된다’는 당위에 공감했을 것이다.

<닥터탐정>은 또 다른 산업재해 사건을 다룰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혹은 잘 모르는 사건들을 극으로 재구성해 사회에 경각심을 줄 것이다. 그래서 <닥터탐정>의 추모방식은 아름다웠고 또한 효과적이었다.